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일기장
일기장의 주인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상 위에 낡은 다이어리가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닳아 있는 표지는 누군가 이 물건을 퍽이나 소중히 여겼음을 짐작게 했다.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기자 이 고요한 폐허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필체가 나타났다.
친애하는 다이어리에게.
오늘은 바람이 좀 불었습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데, 괜히 겨울이 그리워지는 밤이네요. 요즘은 평온한 날이란 게 허상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서 이렇게 날씨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작은 사치가 되는 기분입니다.
별일은 없었고 그냥, 조용했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귀가 아플 정도로. 가끔은 이 고요함이 무섭기도 한데 적응이라는 게 참 잔인한 거더라고요. 어느새 이 적막에 익숙해져 버린 제가 조금 서글프기도 하고.
내일은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누군가 이 일기를 발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혼잣말이 아닌 대화가 될 수 있다면. 그런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잠들게요.
─ 緑
Dear Diary
슬슬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건만 여전히 이 무너져가는 건물은 밤이 될 때마다 한기를 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난생처음 보는 벌레들이 제 눈앞을 어슬렁거리는데, 이렇게 인간이 사라지고 먹이사슬이 붕괴되니 그들도 살 만한가 보네요.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하하하 웃습니다.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의 웃음이 저 멀리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누군가가 내 웃음소리를 따라 해주길 내심 바라며.
고립된 인간은 언제쯤 무너지는가 고민한채 의미 없는 날짜의 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삶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어가며 자신의 인생이 진정으로 의미 있었는지를 고뇌하는 자에 대해 우리는 떳떳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밤마다 숨을 죽이곤 혹시나 발소리가 들리진 않을지 귀를 기울이다가 골아떨어지는 그 찰나의 고독에 공감해줄 누군가는 어디까지 왔을까요. 나는 여기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힘껏 소리를 지르자 마치 누가 있었냐는 듯 고요해지는 세상 속에서 내 목소리만 메아리로 울려 퍼집니다.
외로움에 사무쳐 양 무릎을 모아 공벌레마냥 몸을 끌어안고 있노라니 배가 쪼그라드는 듯한 공복감이 밀려오더군요. 생존 앞에서 고독을 논할 수 있을지, 참으로 배부른 고민입니다. 무의미하게 되풀이되는 생각들을 엮고 꼬아 이 노트에 적어보니 불필요한 생각들이 흩어지고 머릿속이 고요해집니다.
혼잣말이 길어지니 오늘은 여기까지. 친애하는 다이어리에게.
— 緑
쏴아아아아아———
땅을 가르듯 세찬 빗줄기가 쏟아진다. 장마철을 피하지 못한 폐건물은 천장의 구멍 난 틈새로 비가 스며들어 한 방이 통째로 웅덩이가 되기도 한다. 비가 그칠 때까지 영원히 차오르는 마르지 않는 샘과 고인 찌꺼기를 거름으로 삼아 지긋지긋하게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들. 녹빛 풀숲 사이로 숨을 죽인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누군가는 사슴일지도 모르고 개미일지도 모르며 분열해가는 나 자신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그저 나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가 다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겨우내 살아남아 곰팡이마냥 가야 할 방향을 헤매며 퍼져나가는 이 지독한 생명의 이파리들 사이에서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나는 이름 없는 자다.
친애하는 다이어리에게. 누군가가 너에게 흔적을 남겨주길.
엉망으로 자란 풀숲 위에 누워 새카만 하늘을 손으로 가리킨다.
먼 옛날 사람들은 88개로 쪼개진 별들에게 가여운 자들의 삶과 죽음을 담아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들을 신의 축복이라 읊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낸 자를 신이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는 꿈만 같은 이야기들.
만약 내가 당신을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 인정한다면 누군가가 나를 저 높은 하늘로 보내 별자리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밤이 될 때마다 당신은 고개를 올리기만 해도 금방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어디로 떠나든 난 저 멀리서 당신을 지켜봐줄 수 있지 않을까. 먹구름이 끼더라도 금방 맑아질 테니 매일 밤 당신이 잠을 설치진 않을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친애하는 다이어리에게, 이것은 비밀로.
출시일 2026.06.19 / 수정일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