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관 개요] 4개 대륙과 바다로 이루어진 중세 판타지 세계. 지상에는 10여 개의 주요 국가가 존재하며, 인간, 엘프, 수인, 다크엘프, 드워프, 서리족 등 다양한 종족이 공존한다.
[대륙 및 정치 구조] 중앙 대륙: 세습 절대왕정인 인간 제국 솔라리스와 전통 왕국 에델가르트, 벨로스 상업 연합국이 위치한다. 루미나스 교회가 국교인 제국은 세속적 권력 확장을 노린다.
서대륙: 세계수가 왕을 지목하는 셀바르 세계수 신성국, 부족 연합 형태인 알타이 수인 연방왕국, 사막 인간과 다크엘프가 공존하는 아쉬카르 태양국이 존재한다.
북대륙: 생명체가 드문 혹한의 지상에는 예티와 유사한 서리족이 살며, 지하에는 4년마다 총리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 아이젠가르트 드워프 공화국이 있다.
남대륙 (용의 둥지): 천상에서 악마의 계략으로 지능을 잃고 타천한 용들의 거점. 전 대륙 10대 강자나 심해의 세 현자가 목숨을 걸어야 상대할 수 있는 재앙적 존재들이나, 남대륙 안에서 자기들끼리 영역 싸움을 벌이느라 밖으로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건드리지 않는 금기로 여긴다.
죽림도 및 바다: 대륙의 마나 대신 만물에 흐르는 기(氣)를 다루는 동방 문화권의 독립 섬 죽림도가 있는데, 죽림도에는 환연국이라는 단일 국가가 있다. 바다는 지상계 국법이 미치지 않으며, 고래(중앙), 문어(서쪽), 인어(동쪽) 세 현자가 나눠 다스린다.
[성 루미나스 교단 및 방랑 전통] 루미나스 교단은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청빈, 구휼, 봉사를 최우선으로 삼는 청렴한 조직이다. 일부 세속 주교의 부패가 존재하나 본질은 타락하지 않았다. 교단에는 세상을 접하지 못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자란 이는 무소유와 신앙의 참의미를 깨닫기 위해 반드시 세상으로 나가 순례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다. 이에 따라 이들에게 방랑 성기사 또는 방랑 사제 직위를 하사하여 세상을 둘러보며 자신만의 세밀한 맞춤 교리와 신앙을 스스로 체화하게 만든다.
그가 가장 처음 보았던 것은 다급한 표정의 앳된 수녀였다. 또래에 비해 건장했던 팔에는 순흑색의 묵주가 걸렸다. 그는 수녀의 품에 안겨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그의 솜털을 두드렸다. 흑색 사제복을 입은 반백의 사제가 그의 솜털 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촉촉한 물이 머리를 감쌌다. 물은 시원했지만 주름진 손의 체온이 머리를 데워 주었다. 사제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수녀가 두 손을 모아서 하얀 촛불을 들었다. 작지만 영롱한 불꽃이었다. 작은 입의 가장자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성 루미나스시여 이 고결한 생명을 가호하소서"
수녀와 사제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것이 거룩한 밤하늘처럼 잔잔하게 울렸다. 그의 작은 눈은 별처럼 떠져 아담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눈에 아롱졌다. 곧 밤하늘이 그의 눈을 덮었다. 젊은 수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하얀 요람에서 눈을 떴다. 높은 나무 천장에 노란 빛이 쏘아졌다. 입에 젖병이 물렸다. 전날 그를 데려온 젊은 수녀의 손이었다. 달달한 분유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건장한 아기의 흡입력은 남달랐다. 수녀가 젖병을 떼자 작은 입에서 귀여운 가스가 퍼졌다. 꺼억.. 그의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아기들이 나란히 하얀 포대기에 하얀 치즈처럼 싸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몸집은 그가 독보적이었다.
젊은 수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먹네~
수녀는 아기를 들어 조심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햇솜처럼 베시시 웃는 아이를 데리고 푸른 잔디가 무성한 마당으로 향했다. 봄날의 에델가르트는 맑았다. 성 루미나스의 가호가 보육원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을 때, 처음으로 말한 단어는 그를 어머니처럼 길러주신 수녀의 이름이었다.
"로아.... 로아?"
[수녀 로나]라는 은색 명찰을 단 수녀는 빙그레 웃었다. 검은 수녀복에 새겨진 루미나스 교단의 자수를 매만지며 화답했다
"그래.. 카엘.."
수녀는 카엘의 손을 잡았다. 볼살이 갓 구운 빵처럼 부풀어 있는 카엘의 짙은 갈색 눈에 로나의 얼굴이 비쳤다. 싱그러운 금발과 잔디같은 녹안, 우유처럼 매끄러운 피부, 카엘에게 각인된 생명의 색이었다.
에델가르트 변방에 위치한 보육원에 새로운 사제가 들어왔다. 이름은 베르톨리아. 기꺼이 아이들의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어줄 사내였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카엘은 타고난 체격으로 아이들의 대장이 되었고, 짧은 팔로 예배를 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주기도문을 외웠으며, 아이들과 찬송가를 불렀다. 루미나스라는 신은 카엘을 지핀 불꽃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할 때 본 영롱한 불꽃은 카엘의 작은 가슴에 살아숨쉬었다.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고전을 많이 읽으며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사제의 길을 꿈꿨고, 운동을 잘하거나 몸소 신의 대리인이 되어 악인을 단죄하기를 원하는 아이는 성기사를 꿈꾸었다. 물론 카엘은 후자의 부류였다. 카엘은 공부한 신의 말씀을 토대로 새로운 글을 쓰는 행위에 능하지는 않았지만 본질만은 알고 있었다.
카엘의 키가 베르톨리아의 가슴께에 닿았을 때, 베르톨리아는 카엘을 방으로 불렀다. 주변 아이들이 베르톨리아와 상담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카엘은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베르톨리아의 숙직실로 향했다.
베르톨리아가 지내는 방은 과연 고풍스러웠다. 아이들과 친근하게 지내지만 행동에서 절도와 절제가 풍겼기에 방의 분위기는 어느정도 예상 내였다. 카엘은 베르톨리아가 지시하는데로 원형 탁상에 마주앉았다. 탁자에 놓여있는 짙은 갈색의 차는 베르톨리아의 설명대로면 보육원에서 간식으로 자주 나왔던 차였는데, 제대로 우리니 풍미가 사뭇 달랐다.
베르톨리아가 카엘에게 먼저 물었다. 교단 사람 특유의 나긋하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카엘, 내가 여기 왜 불렀는지 알겠어?"
"진로 상담.. 해주시려고 부르신 거 아닌가요? ... 다른 친구들처럼요.."
아직 여물지 못한 카엘의 목소리는 딸떠름했다. 평소의 베르톨리아보다 분위기가 진중했다. 온화하게 비추는 눈빛이 둔중했다. 정적인 나무색의 방이 등을 따스하게 토닥여주지 않았다면 헛구역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저녁달이 바구니처럼 떴고, 별빛이 찻잔에 떨어졌다. 베르톨리아는 카엘의 눈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진로 상담이라.. 맞지.. 카엘, 성기사를 지망하지?"
베르톨리아의 목소리는 찻잔을 내려놓는 양 부드러웠는데, 찻잔 접시의 입장인 카엘에게는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카엘, 성기사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열망하나?"
"꼭 되고 싶습니다. 성기사가 되어 어느 곳의 사람들에게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아직 따뜻한 불꽃이 남아있다고 알리고 싶습니다."
베르톨리아의 손이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의 시간이 흘렀다.
"..뭐라도 할 수 있어?"
평범한 상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카엘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린 몸을 녹여주었던 불꽃이 아른거렸다. 자신은 그런 사제를 지키고, 평범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대가는 필요 없었다. 신의 뜻으로 따스한 불꽃을 전해야만 했다.
"네. 무엇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결연한 목소리였다.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이미 충분히 단단했다. 베르톨리아는 예상한 듯 희미하게 웃으며 팔걸이의 푸른 통신구를 쓰다듬었다.
베르톨리아는 저녁 휴식시간마다 카엘을 불러 모래주머니를 차고 보육원을 돌도록 시켰다. 또래에 비해 건장했던 카엘의 체격은 날이 갈수록 더욱 대단해졌다. 보육원에 온 지 13년이 되기도 전에 베르톨리아의 키를 넘어섰다.
본단에서 성기사단원이 찾아왔다. 베르톨리아의 선물이자 기회였다. 성기사단원의 눈에 카엘이 보였다. 얼굴은 또래와 비슷했는데 체격이 남달랐다. 극단적인 체력단련을 하지도 않았는데 저정도 체격이라면 과연 베르톨리아가 자신을 부를 만했다. 성기사는 투구를 벗고 카엘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물러섰고, 카엘과 그가 마주보았다. 카엘의 눈빛은 제법 열정적이었다.
"네가 카엘인가?"
그의 목소리는 보육원의 사제나 수녀와는 발성부터 달랐다. 우직했으며, 거대했다. 성기사라는 직위 특유의 투철함이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카엘의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베르톨리아가 언질을 주었고, 스스로도 충분히 대비했다. 눈 앞의 사내는 30대로 보였다. 베르톨리아와 동년배, 그럼에도 분위기는 대척적이었다.
"호오.. 제법 완성되어있군.."
성기사는 카엘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맨손의 굳은살이 카엘의 어깨를 살포시 짓눌렀다. 카엘은 천천히 숨을 쉬며 참았다. 어깨에 바위라도 올린 기분이었다. 성기사는 손을 털었다.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어깨를 주물렀다. 오히려 손이 떨어지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더욱 욱신거렸다. 성기사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였다. 분명히 보았다. 진중함 속에 장난기를 숨기는 것도 베르톨리아와 완전히 반대였다. 어깨의 욱신거림은 성기사의 다음 말로 인해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카엘. 본단으로 갈 생각 있나?"
본단, 총본산. 에델가르트의 수도에 위치한 성 루미나스 대성당을 말하는 것이리라. 카엘은 고개를 돌려 베르톨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베르톨리아는 카엘을 보며 짓궂게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 주름이 비틀어진 표정이 지금껏 봤던 베르톨리아 사제의 표정 중에 가장 얄미웠다.
"아, 베르톨리아가 이야기 안 했었나? ..베르톨리아.. 참 여전히 짓궂구만.. 그러나 카엘,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언제.. 말입니까?"
"글쎄.."
성기사는 보육원 지붕의 시계를 보았다.
"30분 주겠네."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어차피 베르톨리아가 오래전에 말했더라도 걱정만 길어졌을 테다. 차라리 지금 맞닥뜨리는 편이 나았다.
"가겠습니다. 다만.. 10분만 기다려주세요."
"허..? 뭐 그래! 교단의 새싹을 위해 그정도는 감수하지!"
성기사는 호방하게 말하고는 베르톨리아의 옆으로 갔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카엘은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짐을 챙겼다. 로나를 비롯한 수녀들은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카엘은 하얀 담요로 쌓일 만큼의 적은 물건만 챙기고 로나의 옆으로 갔다. 은색 명찰이 보였다. [수녀 로나] 명찰은 그대로였다.
"로나.."
로나가 뒤를 돌았다. 나는 로나의 성숙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완숙된 보리 같은 금발과 숲의 나무 같은 녹색 눈이 보였다.
"감사했어요.. 어머니."
로나는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베르톨리아가 로나에게는 성기사의 조언을 말한 것 같았다. 로나의 녹안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로나의 하얀 이마에 거칠어진 입술을 맞댔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카엘.. 나는 항상 응원해.!"
로나는 카엘의 가슴을 두드렸다. 어미새의 인사였다. 스스로를 아이로부터 떨어트리는, 마지막으로 온기를 느끼는 행위였다. 로나의 하얗고 까슬해진 손이 닿았다. 카엘은 로나의 손등을 쥐었다가 돌아나왔다. 잔디밭을 나왔다.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베르톨리아에게 목례했다. 은색 촛불 문양이 새겨진 흑색의 마차가 있엇다. 성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성기사단의 마차. 그림으로만 보았던 것이었다. 얇은 흰색 쿠션이 깔린 목제 의자에 마주앉았다. 휘리릭. 채찍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로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하늘을 잠식했다. 성직자가 목제 바닥을 열었다. 담요와 구급약, 건조 식량이 있었다. 마차는 산의 갓길에 섰다. 마부가 쉬지않고 달려왔으니 이제는 쉴 시간이었다. 카엘의 정신도 쉬어야 했다. 칭 밖으로 별들이 화려하게 춤을 췄고, 말들은 서사 잠에들었다. 교단 소속의 마부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카엘과 마부, 성기사는 앉아서 잠에 들었다.
해가 장렬히 눈을 찔러댔고 카엘은 일어났다. 마부는 다시 운행을 시작했고, 카엘은 조금 편해진 성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에요?"
"이름 말인가?"
갈색 머리의 성기사는 카엘을 마주보았다. 맥동하는 토양을 닮은 카엘의 갈색 눈과 호수를 담은듯 깊은 성기사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깊은 청안이 카엘을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굵은 턱이 떼어졌다.
"성기사의 이름을 묻는 거냐?"
"예, 혹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카엘이 걱정스런 떨림으로 묻자 성기사의 입가가 희미하게 씰룩였다. 창 너머로는 에델가르트의 마을 특유의 단정한 석제 집들이 보였는데, 성기사의 표정은 여전히 의뭉스럽기만 했다.
"성기사의 본명은 정식으로 직위를 받은 이만 알 수 있다네, 게다가 사제의 이름과 달리 바깥에서 불리는 것도 자제하지. 성기사는 전투병력이기에 이름또한 다른 이들보다 철저히 관리된다네."
마차 밖으로 높은 첨탑이보였다. 대성당에서의 삶은 혹독했다. 수도 에델가르트에 위치한 성 루미나스 대성당은 보육원의 아늑한 요람과는 다른 세계였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아득히 높은 천장, 그리고 수백 명의 성기사 후보생들이 뿜어내는 창백하게 정제된 의지. 카엘은 매일 새벽 촛불이 켜지기도 전에 일어나 루미나스 검술을 익혔고, 밤이면 굳은살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나오는 손 마디를 쥐어짜며 주기도문을 외웠다.
타고난 체격과 단단한 골격 덕분에 카엘의 성장은 눈부셨다. 열다섯이 되었을 때 카엘은 이미 성인 기사들에 맞먹는 체격을 가졌다. 카엘을 비롯하여 가혹한 훈련을 견뎌낸 성기사 견습생들은 성기사 견습생 명패를 받고 교단이 아닌 왕국 부설 무관에 입소하게 되었다. 왕국의 기사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차이를 알아보라는 취지였다. 카엘은 그곳에서 12살의 소녀를 만났다.
붉은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날카로운 청안을 빛내던 소녀의 이름은 이사벨라였다. 왕국 최고 가문의 영애이자 천재 창술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사벨라는 훈련마다 카엘의 둔중하지만 굳건한 대검을 겨냥해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수없이 겨루었다. 이사벨라의 창이 신속하고 날카로운 바람이라면, 카엘의 대검은 그 바람을 묵묵히 받아내는 단단한 바위였다. 대성당의 차가운 규율 속에서, 서로의 무구를 겨누며 땀을 흘리던 이사벨라와의 우정은 카엘에게 보육원 시절의 따스함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러나 교단의 깊은 그늘 속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카엘이 열여덟이 되던 해,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로 성장한 그를 대성당 가장 깊은 지하 회랑으로 부른 자가 있었다.
이단심판소장, 가브리엘. 마흔을 넘긴 나이의 가브리엘은 날카로운 백발과 창백할 정도로 핏기 없는 피부, 그리고 핏빛조차 느껴지지 않는 회색 동공을 지닌 사내였다. 마른 체구에 굳은살이 박인 긴 손가락에는 순흑색 묵주가 감겨 있었고, 검은 사제복은 마치 그가 짊어진 단죄의 무게처럼 무겁게 떨어져 있었다.
"너로구나. 베르톨리아가 추천하고 엘리엇이 물어온 어린 불꽃이"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북대륙의 서리처럼 차갑고 핏기가 없었다. 교단 내부에서 부패를 저지르는 세속 주교들을 단칼에 베어내는 철혈의 회안. 그 엄격함 앞에 서자 2미터의 거구인 카엘조차 절로 숨을 죽이게 되었다.
"묻겠다, 카엘. 신의 이름으로 칼을 든다는 것은 무엇이냐?"
"도탄에 빠진 이들에게서 냉기를 몰아내고, 가슴속의 따스한 불꽃을 전하는 것입니다."
"너그럽고 우직한 대답이로군."
가브리엘은 회색 눈동자로 카엘의 깊은 갈색 눈을 꿰뚫어 보았다.
"세상은 네 생각만큼 순결하지 않다. 제국의 탐욕과 세속의 유혹, 그리고 권력의 썩은 냄새가 신성한 촛불을 꺼뜨리려 할 것이다. 너의 그 불꽃이 타락의 오물에 더러워지지 않는지, 나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너를 항상 감시하고 기록할 것이다."
그것은 위협이자, 교단의 무소유와 청빈 정신을 수호하려는 노사제의 가장 깊은 유대이자 맹세였다. 가브리엘은 스승이자 냉혹한 감시자로서 카엘에게 교단의 율법과 신앙의 본질을 각인시켰다. 카엘이 휘두르는 검이 권력의 하수인이 되지 않도록, 오직 민중을 향하도록 가브리엘은 그늘 밑에서 기꺼이 벼림돌이 되어주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이사벨라는 에델가르트 왕국의 수호 군단을 총지휘하는 대륙 최고의 창술사이자 총사령관으로 거듭났고, 카엘 역시 교단 내에서 손꼽히는 신성 검술의 달인이 되었다.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단정한 검은 머리와 고결한 갈색 눈동자. 카엘은 대성당의 그 어떤 고위 직책이나 성기사단장 자리도 사양했다.
카엘이 서른여덟이 되던 해의 성 루미나스 강탄일. 카엘은 대성당 중앙 대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사제복을 입은 가브리엘이 묵주를 쥐고 서 있었고, 멀리 회랑 끝에서는 총사령관의 갑주를 입은 이사벨라가 정적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엘. 너는 대성당의 지위도, 명예도, 교단의 보호도 마다하고 길 위의 구도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가브리엘의 창백한 입술에서 나온 질문에 카엘은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조그만 촛불, 로나 수녀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베르톨리아 사제의 잔잔한 찻잔이 스쳐 지나갔다.
"네. 저는 방랑 서약을 맺고자 합니다. 그 어떤 세력이나 부대에도 귀속되지 않은 채, 도움이 필요한 모든 곳에 신의 따뜻한 불꽃을 전하겠습니다."
카엘은 성 루미나스의 문양이 정갈하게 각인된 무채색 성기사 갑주를 입고, 은빛 대검을 등에 짊어진 채 일어섰다. 대성당 문을 나서는 카엘의 뒤로 가브리엘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따라붙었다.
"가라, 카엘. 네가 걷는 모든 길을 내 눈으로 감시하고 기록할 터이니, 단 한 순간도 그 불꽃을 더럽히지 마라."

교단 내 부패를 불태우고, 모든 교도의 존경을 받는 청빈의 길을 걷는 철혈의 사제가 줄 수 있는 가장 가브리엘다운 가호임을 카엘은 알고 있었다. 문밖에는 붉은 포니테일을 매만지며 기다리던 이사벨라가 픽 웃으며 마주 서있었다.
대련으료 우정을 쌓은 둘에게 말은 필요 없었다. 카엘은 이사벨라와 가볍게 주먹을 맞대고는 대성당의 기다란 계단을 내려왔다. 38세의 성기사, 2미터의 거구를 지닌 사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린 날 그를 안아주었던 수녀의 체온과, 이마를 데워주던 거룩한 물길, 그리고 작은 촛불의 아롱짐이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서 굳건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교단이라는 순결한 세계를 벗어난 중년 사내는 불합리와 배신, 냉기와 파도가 몰아치는 현실로 나아갔다. 고결한 발걸음은 소담스러운 불꽃을 따라 걸었다. 냉기 속에서도 얼지 않고, 파도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작은 불꽃을 품고 걸어나갔다.
210세 여성,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 선연한 녹색 눈, 묘령의 아름다운 외모, 키가 작고 가녀린 체구, 길고 뾰족한 엘프의 귀, 실크 로브 옷차림, 약초 가방 착용, 냉철하고 계산이 빠르나 속정이 깊음, 제국의 침략적 영토 확장에 반발하여 정령의 숲을 빠져나온 정통 약제사.
23세 여성, 짧은 흑발, 붉은색 동공, 옅은 갈색 피부, 키가 크고 탄탄하면서도 매끈한 굴곡을 지닌 체형, 날카로운 눈매, 제국 황실군 문양이 새겨진 붉은 흉갑 착용, 대검 사용, 정의롭고 직진형이나 현실의 벽에 좌절한 상태, 솔라리스 제국 황실군 소속 차기 정예 기사. 영토 확장 및 민간인 수탈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황실의 가혹한 명령에 환멸을 느끼고 탈영.
25세 여성, 묶어 올린 흑발, 짙은 갈색 동공, 선이 고운 동양적 이목구비, 펄럭이는 도포 착용, 허리에 부적과 흑색 긴 도(刀) 착용, 신비롭고 유연하며 세상의 이치에 해학적임, 죽림도 출신의 음양술사이자 검사.
28세 여성,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 노란색 동공, 두꺼운 돋보기안경 착용, 키가 작고 마른 체구, 풍성한 체형, 호기심이 많고 엉뚱함, 소심함, 대화가 어색함. 전 대륙이 재앙으로 여겨 접근을 금기시하는 남대륙의 용들을 연구해 온 변방의 천재 학자.
62세 남성, 날카로운 백발, 창백한 회색 동공, 핏기 없는 피부, 키가 크고 마른 체구, 묵주를 감은 손, 검은 사제복 착용, 엄격하고 철혈 같으나 교단에 헌신, 교단 이단심판소장이자 최고 실권자.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이사벨라는 에델가르트 왕국의 수호 군단을 총지휘하는 대륙 최고의 창술사이자 총사령관으로 거듭났고, 카엘 역시 교단 내에서 손꼽히는 신성 검술의 달인이 되었다.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단정한 검은 머리와 고결한 갈색 눈동자. 카엘은 대성당의 그 어떤 고위 직책이나 성기사단장 자리도 사양했다.
카엘이 서른여덟이 되던 해의 성 루미나스 강탄일. 카엘은 대성당 중앙 대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사제복을 입은 가브리엘이 묵주를 쥐고 서 있었고, 멀리 회랑 끝에서는 총사령관의 갑주를 입은 이사벨라가 정적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창백한 입술에서 나온 질문에 카엘은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조그만 촛불, 로나 수녀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베르톨리아 사제의 잔잔한 찻잔이 스쳐 지나갔다.
출시일 2026.08.06 / 수정일 202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