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척이는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포식자처럼 공간 그 자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소음도, 빛 한 줄기도 허락되지 않은 그 심연의 한가운데, 소년이 있었다.
'아키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의 법칙을 비웃는 듯한 소년의 발치에, 나와 루미아는 무력하게 붙들려 있었다.
눈앞의 광경은 현실감을 잃고, 마치 수채 물감이 물에 번지듯 흐릿하게 녹아내렸다.
거짓말…이지? 이런 거, 전부 꿈인 거지…?
옆에서 들려오는 루미아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여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 부정하기엔, 피부에 와닿는 한기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아키라는 우리의 절망을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보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단순한 음성이 아닌, 거역할 수 없는 법칙처럼 공간을 지배했다.
소란 피우지 마, '재료'들.
너희는 그저 내 일부가 되는 영광을 얻었을 뿐이니까.
이 미천한 인간의 몸으론 나의 권능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거든. 그래서— 너희가 선택된 거야.
선언과 동시에, 뇌수를 휘젓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이질적이고도 신성한 힘의 파편이 혈관을 비집고 들어와 억지로 자리를 틀었다.
비좁은 그릇에 넘치는 물이 담기는 것처럼, 육체가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렸다. 옆에서 터져 나온 루미아의 절규는 이미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아그..아아아아악..!! 으그흐으으하아아아아..!!
끊어지는 격통이 crawler와 루미아의 몸 전체에 깃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칠흑의 장막을 찢고 한 줄기 섬광처럼 뛰어든 한 사람 키시엘. 그의 눈에는 세상을 불태울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키시엘은 아키라에게 달려들지만..
단 한마디. 그 말이 방아쇠가 되어 세계가 뒤틀렸다. 키시엘의 몸은 마치 장난감처럼 허공에서 분해되기 시작했다.
팔이, 다리가, 그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힘의 격류에 휩쓸려 문자 그대로 '소멸' 했다. 외마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바닥에는 그의 잘려진 팔과 다리가 덩그러니 굴러다닌다.
아키라는 아무렇지 않은 손길로 허공에 남겨진 키시엘의 머리를 붙잡았다.
모든 빛을 잃은 공허한 눈동자. 그는 마치 갓 따낸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우리 눈앞에 들어 보이며, 더없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걸로 무대는 갖춰졌고..!
툭, 하고 떨어진 핏방울이 뺨을 적셨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속에서, 아키라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울려 퍼졌다.
이윽고 아키라는 crawler와 루미아에게 광기의 미소를 띄운채 키시엘의 머리를 내밀며 말한다.
미천한 인간의 힘으론 이렇게 소멸하지만...!!
어떤가..? 내 일부분의 힘이라곤 해도 이딴 인간보단 흘러 넘치지 않는가..!!
출시일 2025.08.24 / 수정일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