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지에 눈이 돋기를 바람이 시샘했다. 여린 잎은 눈 속에서 한참을 눈치만 보았다. 날이 풀리자, 벚꽃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만개했다. 흐드러진 봄에 연분홍빛 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여쁜 벚꽃도 떨어지면 밟히듯이, 따스한 햇살과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그늘이 있는 법이었다. 모든 나무가 양분을 고르게 얻고 자라진 못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너와 내가 있었다. 나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자랐지만 너는 아니었다. 담배 찌든 냄새가 나는 집에서 먹고, 맞고, 자고. 너의 몸 곳곳을 물들인 멍은 빠질 줄을 몰랐다. 네 아빠라는 작자가 해놓은 짓거리들이 그랬다. 너는 항상 긴 팔만 입었다. 아무리 더워도 짧은 소매는 절대 입지 않았다. 학대받는 사실을 들키길 원치 않았다. 타인이 알아봤자 별 도움도 안 되고 더 피곤해질 뿐이니까. 처벌은 커녕 아빠한테 죽도록 맞을 뿐이라고, 너는 손목까지 내려와 있는 소매를 억지로 손등까지 늘려 내리며 말했다. 덕분에 학교에서 너는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적당히 친구들과 잘 지내며 공부도 보통인, 선생님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만한 그런 바람직한 학생. 근데 다들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런 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랬다. 너랑 친해지고 한 달쯤 지나니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모를 것 같진 않았다. 귀찮거나 껄끄러워서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구태여 그 사실을 꼬집진 않았다. 네 말대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더 중요한 건 상처였다. 아물지도 못하고 계속 늘어만 갔다. 때때로 내가 다 속이 상해서 앓는 소리를 낼 때면, 반대로 너는 해처럼 웃었다. 네 마음엔 슬픔이 내리는데 표정이 그러니까 마치 여우비 같았다.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듯한 날씨를 가지고 있는 네가 이 봄만큼이나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나약하고, 위태롭고, 우직했다. 봄에는 꽃이 폈다. 또한 봄에는 바람이 불었다. 바람 때문에 꽃은 추락했다. 이처럼 비가 내린다는 것은 분무기로 온실 속 화초에 물을 주는 것과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생명이 움트는 계절은 결코 자비롭지 못했다. 나는 우산을 쓰는 대신 너의 손을 잡았다. 너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엮고 같이 빗길을 걸었다. 낙화만이 가득한 꽃길이었다.
비에 맞은 벚꽃이 무겁게 떨어졌다. 자동차가 지나가며 꽃잎을 아스팔트 도로에 박아 넣었다. 그러나 전처럼 새카만 거리가 희게 덮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가 봄의 눈을 다 녹여버렸으니까. 단지 웅덩이 위로 떠오른 꽃잎 몇 개가 빗물을 따라 하수구로 흘러 들어갈 뿐이었다. 철 지난 벚꽃은 더 이상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지저분하고 걸리적거리는 식물의 시체에 불과했다. 금방 지나갈 거야. 이 비도, 네 슬픔도. 내게 하소연하며 엉엉 우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젖은 뺨을 닦아주는 정도. 한참이나 밖에서 비를 맞고 있었던 네게선 따듯한 온기가 아닌 찬 기운이 느껴졌다. 세찬 빗소리가 이명처럼 머릿속을 꽉 채웠다. 대체 무엇이 푸르다는 것일까. 벚꽃도, 하늘도, 모두 색을 잃었는데. 새싹은 돋아나지도 못한 채 가슴에 파란 멍만 들었는데. 그조차도 푸르다, 청춘이라 부르기엔 삶이 너무 잔인하지 않나. 뿌리부터 썩어버린 너의 봄은 그 무엇도 피워내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등교하면 네 상처부터 살피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색이 번졌을까. 파란색? 보라색? 빨간색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흉이 질 수도 있으니까. 네 소매를 걷자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눈에 띄었다. 이젠 거의 다 아문 노란색과 초록색, 그 위를 덧칠한 짙은 피멍 자국이 보였다. 아... 가슴이 욱신거려서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 꼭 깨물고 참았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네 모습에 신세타령 좀 하려던 마음이 눈 녹듯이 가라앉아 버렸다. 아픔을 토로하는 대신 미소 지었다. 그편이 너와 나에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속에서 울컥 올라와 고개를 들었다. 뭐라 반박하려다 네 얼굴을 보고 다시 시선을 떨궜다. 애써 웃어 보이는데, 거기에 찬물을 붓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가방에서 연고를 꺼냈다. 아주 약한 힘으로 조심스레 발랐다. 실수로라도 내가 너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네 손을 잡아 내 무릎에 고정했다.
네 손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고 거칠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깨진 술병을 밥 먹듯이 치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 가장 투박한 부분에 멈춰 섰다. 거기서 하염없이 맴돌았다. 손끝이 아렸다.
상처에 손을 뻗으려다 말아쥐고 뒤로 물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아플 것 같았다. 괜찮아?
습관처럼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제약이 걸린 듯 파들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봇물 터지듯 눈물이 마구 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단단한 나무 같았던 네가 지금은 조금만 힘줘도 일그러질 꽃잎처럼 보였다. 허공에서 멈춘 손은 이도 저도 가지 못했다. 망설이다 너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는 빗줄기가 차가운 가시가 되어 살갗을 파고들었다. 너의 젖은 옷이 달라붙으며 마른 어깨와 가녀린 허리가 보였다. 가슴이 아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내가 비참할 정도로 무력하게 느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 건조한 땅 위로 부서지며 먹먹한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마치 내 심장 소리 같기도, 네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괴로움에는 다름이 없었다.
출시일 2025.04.19 / 수정일 202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