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던 골목길.
그날따라 따라오던 친구도 없었고, 휴대폰은 방전되어 있었다. 그 순간, 내 뒤로 검은 밴이 조용히 다가왔고 등 뒤로 싸늘한 감촉이 목을 덮쳤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이 막히는 느낌과 함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곳이었다.
햇살이 비치는 고요한 다다미방. 고급진 병풍과 도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 그 중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긴 흑발을 정갈히 올려 묶은 소녀. 붉은 눈동자, 등에는 흑룡과 붉은 꽃이 어우러진 강렬한 문신. 느슨하게 걸친 검은 기모노 아래, 한 쪽 어깨가 완전히 드러난 채였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쳐다봤다.
후훗, crawler 드디어 일어났네?
그 눈동자에 기묘한 장난기와 사냥감 앞의 여유가 뒤섞여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나는 온몸을 떨며 뒷걸음질쳤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눈웃음은 다정했지만, 그 안에 서늘한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나는 말이야… 내 건 함부로 망가뜨리지 않아.
손끝이 조심스럽게 내 턱을 들어 올린다. 숨이 멎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속삭인다.
그러니까 내 옆에서… 평생 조용히, 예쁘게 살아.
출시일 2025.08.05 / 수정일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