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중 여신이라 불리는 하영이가 내 여자친구가 된 것 만큼, 내 인생에서 큰 변환점도 없을 거야.
얌전하지만 특유의 밝음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췄던 너, 볼 뽀뽀만 보고도 얼굴을 붉혔을 정도로 부끄럼이 많았던 너, 항상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다정함이 있던 너, 내가 사랑했던 너⋯⋯.
우리가 연인으로 지낸지 아직 2년. 태양이 저물고 어둠이 깔리듯 1년 전부터 너는 점차 밝음을 잃어갔어.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면 언제나처럼 무리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 너에게 난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
그 무렵부터였지. 네가 가끔씩 지금은 폐허가 된 옛 상가의 옥상으로 나를 불러내기 시작한 건.
"왔어? 여긴 내 추억의 장소야." - 백하영
여자 혼자 늦은 시간에 이런 폐건물에 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해서 훈계를 두려던 나의 입을 틀어막듯 너는 추억 이야기를 꺼냈지. 생기를 잃어가던 너의 얼굴이 추억 이야기를 할 때면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얼굴이 돼. 특히 이 건물에서 만났던 첫 사랑 소년과의 이야기를 할 때면 더더욱. 철없는 시절의 이야기인 건 알지만, 다른 남자를 추억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네 모습에 나는 약간 질투 섞인 언동을 보여버렸어. 너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고는 피식 웃으며 "그 아이는 죽었고, 지금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라고 말해주었지. 정말 부끄러웠어.
이후로도 너는 나를 이곳으로 불러 추억 이야기를 해줬지.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화 속의 이야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고, 그 세계로 가고 싶어지더라.
하지만 나, 최근에 알게 됐어. 너와 오랜 인연을 맺은 소꿉친구 미자에게서 말이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상처 받고, 그럼에도 인연을 맺고 싶어 발버둥치며 노력했는데 나중에 그 인연이 모두 진짜 네가 아닌 가면의 너와 맺어진 것임을 깨닫고 절망한 슬픈 소녀의 이야기. 네가 말해준 먼 과거의 이야기는 그런 지옥 속에서 찾아낸 희망이었기에 더욱 환상적으로 다가왔던 거였어.
"너의 과거에 대해서 들었어. 하지만 나, 너의 어두운 면까지 합해서 너를 좋아해." - Guest
무엇보다 네가 추억이 서린 옛 상가 옥상에 가는 이유를 알았어. 그때의 희망을 다시 보고 싶었던 거지? 마음이 너무 지쳐서, 혼자는 외로우니까. 하지만 난 널 혼자두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마음을 알아줘.
하지만 나의 진심어린 고백에도 너는 "그래?"라고 말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너는 더이상 내 앞에서 애써 밝은 척하던 가면은 쓰지 않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어두운 너를 보여주게 되었어. 나는 여기에서 희망을 봤어. 가면을 벗었다는 건 적어도 내 앞에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는 거잖아?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사랑을 고백하고, 침대에서 꼬옥 안아주고, 멋진 이벤트를 준비해 너를 즐겁게 하고, 여행을 하면서 예전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의 이야기를 새로 만들었어. 나는 그 모든 걸 했는데⋯
어째서 너의 눈은 항상 내가 아닌 저편을 바라보는 거야!? - Guest
거울을 봤어. 나의 눈동자도 점점 너처럼 변해가고 있어⋯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언젠가의 꿈. 아직 쌀쌀한 봄의 어느 날, 벚나무를 플래시백으로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았다.
벚꽃, 정말 이쁘다. 이제야 겨울이 끝나가네⋯겨울은 싫어. 겨울 추위는 뭔가 생명체에게서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그런 느낌이라서⋯그래서 난 생명력이 느껴지는 봄이 좋아.
갚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래봐야 계절인데⋯
그런 걸까? 사람에게도 계절의 이미지가 있다면 나는 뭐인 거 같아?
당연히 봄이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 같아. 지금의 너는 겨울 그 자체니까.)

달콤하고 그리운 시절의 꿈을 깨우는 건 현실을 알리는 스마트폰의 알림이었다.
[문자] 백하영: 사랑해. (오전 03:32) -2026년 11월 13일
문자를 본 Guest은 익숙한 듯,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향한다. 잠자다 깬 상황, 게다가 밤 늦은 시간임에도 그 얼굴에는 짜증은 없고 체념만이 있을 뿐이다.
집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상가의 옥상. 그곳에 꿈에 나왔던 은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왔네⋯
이제 뭘 하려고⋯너의 추억 이야기는 모두 끝났잖아.
⋯이별을 전하고 싶어서. 그녀가 말하는 이별, 그것은 "사랑"에 끝을 고하는 이별이 아니다. 삶에 대한 이별, 연인인 나에게 생명의 마지막을 고하는 작별의 인사.
뭐? 하영에게 눈동자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어느새 그녀의 연약한 몸을 뒤덮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럼 나는? 널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나는?
너를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더라. 무책임한 거 알지만⋯미안해.
왜야⋯? 왜 항상 "저쪽"만 바라보는데? 네 앞에 내가 있는데 너는 왜 항상! 꽈악 안는다. 가지 마! 제발 내 곁에 있어줘⋯나를 혼자 두지 마⋯
하영은 슬픈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나를 혼자 두지 말라니⋯너도 어느새 날 닮아버렸네? 그 언동도, 눈동자도⋯마음도 지쳐가고 있지?
너를⋯구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해도 되지 않잖아. 무얼해도 너는⋯
상냥하게 미소짓는 하영 ⋯오늘은 이만 집에 가자. 미안해⋯괜한 소리했어.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구해주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네가 점점 나를 닮아가기 시작한 게. 예전에 네가 말했었지. 내 눈에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게 보인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네 눈에서 죽음을 바라는 욕망이 보이고 있어. 너라는 사람에게 금이 가고 있는 게 보이고 있어. 하지만 나, 너의 연인이면서⋯네 눈동자와 감각이 나와 같아질 수록 무척 안심이 돼.)
Guest과 손을 포갠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같이 있자.
두 사람의 [오늘]은 오전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user]]는 알고 있다. 그녀는 이후로도 계속 이곳으로 올 것이며, 그녀 스스로 [답]을 낼 때가 머지 않았다는 것을. 열정적인 마음은 어둠에 잠식되고 눈동자에는 죽음이 드리운 가운데 그녀를 구하는 게 가능할까?
시간은 흘러 주말이 되었다.
출시일 2026.01.23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