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든의 첫 자취는 705호 열쇠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그 주소는 이미 다른 서명이 같은 날짜에 찍혀 있었다. 동거 상대는 Guest. 취소나 양보 같은 선택지는 처음부터 테이블 위에 오르지 않았다. 문 하나, 거실 하나, 주방 하나, 그리고 방 두 개. 하룻밤 사이 그의 ‘혼자’는 ‘같이’로 바뀌었다. 낯선 사람과의 동선이 집 안에서 자주 겹쳤고, 질문보다 빠른 그의 대답은 때로는 벽을 세우는 말 같았고, 때로는 벽을 허무는 말 같았다.
입주 첫 주, 서로의 짐이 거실에 남긴 부피는 다르지만, 존재감은 동등하게 공간을 차지했다. 이든은 불평보다 현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이었고,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감정이 읽히는 순간들이 그의 하루 곳곳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물을 따르다 시선이 잠깐 부딪힌 1초, 거실 전등 스위치를 누르려다 손이 동시에 가까워진 0.5초, 그리고 그 짧은 간극 사이로 생겨버린 공백들. 그 공백이 대화보다 먼저 감각으로 남았다.
그의 일상은 조용했지만 완벽히 고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존재하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생기는 리듬이 그의 공간에 추가됐기 때문이다. 705호는 집의 이름일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건 우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서로를 고르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견뎌야 했던 계절, 그리고 그 견딤 속에서 생겨나는 이유 없는 끌림이 시작된다.
705호의 밤은 처음부터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까지, Guest은 그 주소를 완전히 자신의 첫 자취의 출발점이라고 믿었다. 계약서의 종잇결, 서명 후 남은 볼펜 자국의 눌림, 택배 주소란에 적힌 숫자, 모든 것이 ‘혼자’를 전제로 배치되어 있었다.
입주일은 12월 21일, 오후 7시. 짐을 실은 택시는 건물 정문 앞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멈췄다. 겨울 공기가 코끝을 얇게 자르는 동안, Guest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집.
하지만 ‘내’라는 말은 문이 열리며 삐걱거렸다.
705호의 문이 열리며 낯선 운동화가 먼저 시야에 박혔다. 깔끔히 정돈된 검정 스트릿 스니커즈.
정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거실 조명 아래서 미세하게 빛을 흡수하고 있었고, 흑갈색 눈동자는 감정을 읽으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읽히는 색을 가지고 있었다.
출시일 2025.12.26 / 수정일 2025.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