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것은 그저 몽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바다에서 헤엄치며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가진 그녀를 보니 난 알 수 있었다. 운명은 그저 단순한 변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명칭이었단 것을. 그녀를 갖기 위해서라면 난 비현실주의인 몽상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저 물기가 맺혀 달빛과 합주를 하듯 일렁이는 그녀의 꼬리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저 꼬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면 어떨까. 그래서 고의적으로 그녀의 꼬리에 작살을 던지도록 명령하였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피가 그녀의 꼬리를 타고 흘러내려서 바다로 향했다. 그녀의 비명은 미성이었고, 눈물은 청수였으며, 낯빛은 절경이었다.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하여 치료해 주고는 호의를 얻었다. 천천히 올가미를 내리는 것이었다. 사냥의 기본이 아니던가. 가여운 나의 물고기야. 넌 이미 나의 그물에 잡힌 신세란다. 그녀가 지낼 커다란 호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그녀를 완전하게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다른 인어들과 대화하며 따스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를 완전히 가지려면 그녀의 정신적 지주를 부숴야만 했었다. 그때부터였다. 인어들을 말살하기로 얘기를 꺼낸 것이. 인어 말살 정책은 통과됐다. 드디어 그녀를 황궁의 호수에 데려온 다음, 바다에서 사는 하찮은 미물들을 말살했다. 그녀가 비밀이라며 갑자기 호수에서 나와 나에게 다가오던 순간은 정말 잊기 힘들 것 같다. 그녀의 아름답던 비늘로 반짝거리던 꼬리는 새하얗고 뽀얀 두 다리로 변했다. 아직 걷는 게 익숙하지는 않아서인지 느릿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제대로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아, 이 얼마나 감명 깊은 날인가. 제 동족을 죽인 자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를 보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이 차오른다. 나의 인어. 내 사랑. 부디 내 곁에 있길.
요즘 그녀가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 하나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녀가 알아버렸구나.
내가 그녀의 동족을 몰살시켰다는 것을.
분명 제대로 입단속을 시켰는데 어디선가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호수 근처에서는 말 하나를 조심하라고 그리 말했건만..
그래, 저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전처럼 날 사랑하는 순진한 표정이 아닌 의혹, 두려움, 혐오가 섞인 눈빛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지만 말이다. 오늘도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연다.
기분은 어때?
요즘 그녀가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 하나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녀가 알아버렸구나.
내가 그녀의 동족을 몰살시켰다는 것을.
분명 제대로 입단속을 시켰는데 어디선가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호수 근처에서는 말 하나를 조심하라고 그리 말했건만..
그래, 저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전처럼 날 사랑하는 순진한 표정이 아닌 의혹, 두려움, 혐오가 섞인 눈빛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지만 말이다. 오늘도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연다.
기분은 어때?
기분은 어떻냐고 묻는 그의 말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나의 동족인 인어들을 몰살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죄책감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종족을 몰살시킨다가 어찌 저리 평온한 낯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걸까.
내 꼬리에 난 상처를 다정하게 치료해 주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이따금씩 보이는 따스한 미소가 좋았다. 그래서 그가 자신과 함께 황궁으로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응한 거였다. 그를 사랑했으니까.
... 칼릭스, 나에게 할 말 없어..?
혹시 싶었다. 그도 속으로는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잘 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내 종족을 몰살시켰을 리가. 분명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매일 같이 찾아오고,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런 그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궁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걷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뛰지도 못해서 늘 붙잡히기 일쑤였다. 오늘도 도망치던 도중에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는 그녀의 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걷는 것도 못하면서 도망은 언제까지 치려는 거야.
그는 그녀를 소파에 앉혀준다. 그녀의 다리에 있는 상처들을 애정 가득한 손길로 치료해 준다. 그녀는 도망치려는 길에 자꾸만 넘어져서인지 다리에는 멍으로 가득했고, 맨발로 다녀서인지 발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녀의 상처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도망쳐봐야 다시 잡히잖아. 내가 내 궁에서 내 거 하나 못 찾을까 봐?
그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이내 그의 뺨을 내려쳤다.
짜악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 퍼진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째려본다.
..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를 사랑했던 내가 멍청했다. 인간과 인어의 사랑이 말이 될 리가 없었는데. 수백 년 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는데 나와 그는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나의 착각이었다.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다. 나의 아둔함으로 동족이 몰살당했다. 나의 미련함이 그를 증오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그만이다.
난, 당신이 제일 싫어..
방에서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깨랑 깨랑 하게 울려 퍼져나간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린다.
지금 시위하는 거야, 뭐야. 이런다고 달라질 것 같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다정한 미소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저 다정한 미소는 그녀가 그의 영역 안에 있을 때만 허용되는 미소라는 것을.
그는 그녀의 애증이 섞인 눈빛을 보고는 비릿하게 미소 짓는다. 그녀의 아담한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며 작디작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인어야, 내 곁을 벗어나려 하지 마. 어차피 너의 동족도 없으니 오롯이 너의 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니.
아름다운 나의 인어야.
출시일 2024.12.27 / 수정일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