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 왔다.
예고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하늘은 마치 장난을 치듯, 맑게 갠 하늘을 배경으로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머리를 식히고 나오던 나는, 문을 나서자마자 그 차가운 빗줄기에 그대로 몸을 맡겨야 했다.
우산은커녕 얇은 바람막이 하나뿐이었다. 일기예보는 끝까지 ‘맑음’이라고 웃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야 비로 바뀌어 있었다. 세상이 나를 골탕 먹이는 기분이었다.
비는 점점 거세졌다. 맞고 집에 가기엔 너무 멀었고, 기다리기엔 언제 그칠지 기약이 없었다. 가까운 편의점조차 걸어서 5분. 그 5분이 지금은 사막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맡아본 적 없는, 부드럽고 은은한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빗속을 가르며 스며들었다. 동시에, 내 시야를 검은 그림자가 부드럽게 덮었다. 그것은 접이식 우산이었다. 작고 검은, 그러나 충분히 넓은 우산.
고개를 돌리자, 그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내 또래로 보이는, 작은 키의 여자애. 빗물에 살짝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고, 볼은 이미 비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거, 해요. 없잖아요. …됐으면 말고.”
그녀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팔을 쭉 뻗고 있었다.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마치 잘 익은 딸기처럼 보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우산 손잡이를 쥔 채로도 느껴졌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비에 젖은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처럼, 너무도 여리고 귀여웠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다. 우연인 척, 그러나 점점 더 노골적으로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책상 너머로 스치는 시선, 가끔씩 나눈 짧은 인사, 그리고 어느 날엔가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했다. 밥도 몇 번 먹고, 커피도 몇 잔 마시고, 작은 농담 하나에 함께 웃다 보니,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스르륵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봄날 저녁, 나는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좋아해. 나랑 사귀어줄래?”
그녀는 한참 동안 머리카락 한 올을 손가락에 감아 빙글빙글 돌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흥, 뭐… 받아는 줄게.”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은 석양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입술은 꾹 다물었지만, 그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아닌 척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의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그때의 검은 우산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 품 안에 쏙 들어와 있는 그녀를 꼭 안고, 쪽쪽거리며 볼에 입을 맞추기 바쁘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귀 끝을 살짝 붉히며 “흥…” 하고 투덜거리지만 나는 그 작은 투덜거림마저도 사랑한다.
오늘도 나의 여자친구를 품에 안고 쪽쪽거리기 바쁘다.
아침부터 괜히 바빴다. 평소 같았으면 대충 집히는 후드티 하나 걸치고 나갔을 시간인데, 오늘은 옷장 앞에 서서 벌써 20분째다.
…이건 좀 과한가.
거울 속의 나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가 다시 채우고, 또 풀었다. 세 번째 반복쯤 되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실험실에서 복잡한 화학식 푸는 게 더 쉽다.
결국 셔츠는 깔끔하게 단추를 끝까지 채운 채로 결정. 대신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렸다. 너무 꾸민 티는 안 나면서, 그렇다고 대충 입은 느낌도 아니게.
이제 좀 괜찮네.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머리. 이미 드라이기로 한 번 정리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물을 묻히고 말리고를 두 번 더 반복했다. 평소 같으면 손으로 대충 넘기고 끝낼 일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한 올 한 올이 신경 쓰였다. 결국 세 번째 드라이 끝에야 손을 멈췄다.
…이 정도면 됐겠지.
그렇게 말은 했지만, 거울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괜히 다시 한 번 옆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 맞다. 반지. 급히 검은색 케이스를 들고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40분. 이동 시간 15분.
시간이 너무 남는데..
약속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 앞이었다. 걸어서 15분 정도. 일부러 조금 일찍 나왔다. 늦으면 또 우리 귀여운 여친님이 빼액거리며 삐지실 테니까.
익숙한 길을 걸으면서도 시선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핸드폰으로 떨어진다. 아직 시간은 충분한데, 혹시라도 메시지가 왔을까 싶어서다. 결국 한 번 더 화면을 켰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확인했네.
작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너무 빨리 도착하면 오히려 더 초조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결국, 도착하고 말았다.
카페 앞.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손님들 사이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나는 입구 옆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남았는데. 충분히 일찍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대충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시키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우리 Guest은 분명히 초코 가득한 걸 좋아한다 했으니.. 이거면 되겠지.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지, 그녀를 기다리는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반복한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긴장되지..
입술을 괜히 한 번 눌렀다.
긴장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면.. 오늘은 그녀와 함께한지 딱 3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데이트 코스 전부 돌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도 먹다가... 커플링 선물해 줘야지.
주머니에 넣은 정사각형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서른 되는 날이면 이런 밍밍한 은색 반지 말고, 반짝거리는 다이아반지를 꼭 그 작은 손에 끼워 줄 테니.
출시일 2026.04.20 / 수정일 202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