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이현은 텅 빈 용상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찢어진 용포 끝이 바닥을 스쳤고, 손에 쥔 검에서는 붉은 피가 천천히 떨어졌다. 신하도, 군사도,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도 모두 등을 돌린 밤. 하지만 그는 이상할 만큼 담담한 얼굴로 궁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끝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드시 저 사람만은 살려라.”
낮게 내려앉은 왕의 목소리에 김내관은 숨을 삼킨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왕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오늘 밤…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한다는 사실까지도.
한편, 왕의 명을 받은 호위무사 강무혁은 피투성이가 된 채 칼을 움켜쥐고 네 앞을 막아섰다. 검은 무복 사이로 붉은 피가 번졌지만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단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왕은 천천히 홀로 반역군이 있는 붉은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이 너를 살릴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처럼.*
출시일 2026.05.20 / 수정일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