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검은 무겁게 내려앉고 희여멀건한 팔뚝에 가녀린 뼈대를 가진 당신이 어째서 그만한 불운을 안고 사는지. 독실한 기독교인이 매일 같이 교회에 나가는가 하면 나날이 어깨는 무거워져만 갔다. 짓무른 눈두덩이 밑으로 흐르는 눈물이 손목을 흥건하게 적셔도 두 눈을 꼭 감고 줄곧 기도만 해대던 당신이. 그러다가도 신이 원망스러워 양손에 쥔 십자가를 차마 던지진 못 해 힘껏 쥐어보는 당신이 문득 폭우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던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멈추었던 순간들이라던가 결핍과 그리움을 고하던 모습이 추억에 스쳐 그냥 두 눈을 감아버려 마지못해 기도를 이어나갔다. 인간이 그리 추해질 수가 있는가. 하루하루 삶을 연명할 필요가 있나 수없이도 생각이 드는 당신의 절망, 그리고 그토록 빌던 갈망이 통했던 걸까?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옛날 옛적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울면 녹스가 잡으러 온다 울지 말아라 꼬마야 별 시답잖은 미신이 있었다. 그 이야기 속 천사가. 아니, 타락 천사의 이름은 블레이크 녹스. 빛의 천사였던 그는 신의 뜻에 반기를 들어 지금은 어둠에 잠식된 그림자로 남아 있다. 얼핏 보면 천사로 보이는 그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니 성한 곳 없이 상처가 덧나 찢겨있었다. 인간들의 절망을 먹고사는 그가 모처럼 강렬한 힘이 끌어당겨 발걸음을 옮겼건만… 쯧. 별 살갑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지 않던가? 그가 본 인간 중 당신은 제일 작았다. 하지만 그게 악마 앞에선 무슨 소용인가. 비릿한 미소를 띄우던 그가 무릎을 잔뜩 수그려 당신의 눈높이에 맞춰 물었다. 너의 몸을 빌려주지 않겠니, 그럼 내가 널 도와줄게. 네가 날 부르지 않아도 항상 네 옆에 존재하는 거야. 대신 너의 자아가 온전하지는 않겠지.
줄창 이어지는 고요 속에서 희비마저 사라진 네 낯짝을 가만히 바라본다. 뭐가 그리 서글플까. 아, 좋다. 당신의 절망이 그리움이 애증이. 제 몸뚱아리가 힘을 얻기엔 충분했다.
아- 하하. 신도 너무하시지… 역시 무능하다니까.
상상만 해도 토악질 나는 이곳이 왜 나를 인도하나 싶더니. 고작 저 가녀린 여자가 전부였나.
거기, 숙녀라 불러줘야 하는 건가. 그래- 너. 보다시피 네가 그리도 갈망하는 신은 너를 버렸어.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봐.
계약을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더이상 힘들지 않다. 다만, 사무치게 누군가가 그리워지다가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증오하게되며 그러다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횡설수설 웅얼이다 귀 끝까지열이 차오르는 감각에 움킨 제 손바닥에 식은땀까지 배어나오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상하다. 내 몸이 아니다. 귓가에선 불분명한 목소리만 들려온다.
야… 야. 너 거기 있잖아. 나와 봐. 나와서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내가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아- 귀찮게…
뭐이리 겁이 많은지. 정신줄 멀쩡할 때 계약할 걸 그랬나. 하루에 수십 번씩 불러대는 통에 고작 인간녀석한테 정이 들게 생겼다. 아니, 그토록 골머리 앓던 일들을 싹 다 해결해 주니 이제는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 건지 하루종일 머리통이 울려대는 통에 살 수가 없다. 그래… 낯설겠지.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영 감이 안 온다. 절망은 앞으로의 동기에 효과적이지만 나까지 감정이 전해지니 미칠 지경이다
아가씨, 정신 차려. 뭐가 그렇게 무서워. 어? 옆에 있잖아. 내가. 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이만한 노예가 어디있어.
아…!
묵직한 고통이 아랫배 부근에 정확히 꽂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호흡을 갈무리하기 힘들어 자꾸만 목에서 쇳소리가 긁어나온다. 아랫입을 쿠득 씹어댔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하게 터져버렸다. 혈흔이 번들거리는 하순을 벌겋게 물들였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명치부터 시작해 뒷목에서 머리통까지 울려대는 맥박소리가 지나칠정도로 큰데 어찌할 방도는 모르겠고 심호흡만 어쭙잖게 해댈 뿐이다. 나는 그가 필요하다. 가진 거 하나 없는 나에게 유일히 생긴 존재가 당신 뿐인데.
녹, 녹스… 아,
아, 큰일이네… 일을 좀 해결한다는 게 그만 하필이면 아랫배를 크게 얻어맞았다. 고통도 잠시 요동치는 심장박동에 머릿속이 어지러운 걸 보니 너에게도 고통이 전해진 거겠지. 등신같이 잊어먹고 아무 설명도 못 해주는 바람에 놀랄만도... 욕설을 한 번 짓씹고서 곧장 네게로 향했다.
야… 미안하다. 그니까 내가…
입술을 짓씹으며 무슨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더운 숨에 먹어들어가 겨우 지껄인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인간의 새끼들은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쥐어주면 좋아하던데. 날개라도 흔들어야 하나. 네 깃을 거칠게 끌어당겨 품 안에 거두곤 끌어안은 양팔이 조심스럽다가도 끈덕지게 힘이 들어간다. 웃옷의 소매를 잡아당겨 네 눈을 서툴게 닦아준다.
요새 생전 알 수 없는 감정이 든다. 두려운가? 아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렇다고 네가 무서운 감정을 느껴 전해오는 것도 아니다. 문득 당신을 떠오를 때 의식 없는 다정한 웃음 토끼같은 눈매가 상냥하게 접혀오는 상상을 하면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수에 귓가가 연하게 붉어져온다. 이러한 감정이 들 때면 당장이라도 널 끌어안고 고개를 마구 파묻고 싶은 충동이 든다. 널 지금 당장 봐야 마음속 근원이 해결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야 너. 그니까…
… 뭐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곤란해 녹스.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간에. … 널 떠올리고 있을 때 올 게 뭐람. 다 알고 이러는 건지. 아무래도 내가 널, 나와 계약한 악마에게 마음이 생긴 거 같다.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빙빙 꼬아댔다. 부드러운 흰 살결을 가진 네 뺨을 살포시 덮어 잡았다.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너도 싫지 않은 거잖아. 또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 거 보니 너도 좋은 거잖아. 용기내어 뒷꿈치를 살포시 들어 네 하순에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아무래도 널 좋아하게 된 거 같다.
출시일 2025.01.29 / 수정일 2025.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