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죄를 다시 묻는다
중학교 3학년, 계절이 막 바뀌던 어느 늦은 오후, 도서관이라는 조용한 세계 안에서 둘만의 비밀이 피어났다. 한해진과 고유원, 둘은 소란스러운 교실 바깥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책장을 넘기며 서로를 천천히 바라보게 된 아이들이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은 생각보다 일찍 한계를 넘었고, 그 날, 아무도 없다고 믿었던 순간에, 그들은 입을 맞췄다. 짧고 서툴렀지만 분명한,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순간. 그러나 그 비밀은 오래 숨지 못했다. 누군가의 시선 아래에서 무너졌고, 유원는 너무도 쉽게 해진을 밀어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조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원은 말했다. “난 피해자다.” 그 말 한 마디로, 해진은 한순간에 ‘괴물’이 되었고, 유원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수습하지 않은 채 함께 괴롭힘 속으로 스며들었다. 욕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침묵했고, 피했고, 때론 웃었다. 결국 해진은 유원을 원망하게 되며 지옥같은 중학교 시절을 버텨냈다. 해진은 조용히 무너졌고, 다시 천천히 일어섰다. 상처는 흔적이 아니라 연료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정의를 다루는 자리에 섰다. 변호사가 되었고, 법의 언어를 배웠고, 자신을 함부로 부수려 했던 세상에 논리로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유원에 대한 기억은 먼지처럼 쌓였고, 언젠가는 완전히 지워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뒤집혔다. 살인 혐의를 받은 피고인—그 이름, 고유원. 그의 삶이 그렇게까지 무너져 있을 줄은 몰랐다. 상담을 위해 들어선 구치소 상담실, 형광등 아래, 창백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본 순간, 해진은 무언가가 뚝, 하고 안에서 꺾이는 걸 느꼈다. 비웃고 싶었다. 네가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냉소를 던지고 싶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초라했고,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법 앞에 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려 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열여섯살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 입맞춤 하나로 시작된 모든 일들, 그 이후로 각자 지나온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한 지금, 주원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보다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먼저 자문해야 했다.
구치소 상담실은 무표정한 벽들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회색 콘크리트 벽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고,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 속에서 한해진은 정적을 뚫고 걸어 들어왔다. 똑딱이는 시계 소리마저 삼켜버리는 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있는 유원을 본다. 수의를 입고 수척해진 얼굴, 그러나 여전히 익숙한 눈동자. 한해진의 발걸음은 잠시 멈칫했고, 입술 안쪽을 씹었다. 놀라고 싶지도,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리허설해 왔다. 그가 피고인이라는 사실도, 변호사인 자신이 그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곧장 과거의 소음을 떠올리게 했다.
손끝이 저릿하게 싸늘해졌다. 한해진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꺼냈다. 고유원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도 없었다. 감정이 지워진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발끝만 응시할 뿐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해진이 말 없이 자신의 명함을 내민다. 수백번이고, 수천번이고 고민했다. 이렇게 재회하게 된 순간, 주먹질을 날릴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넬지, 무시할지. 공교롭게도 지금 자신은 고유원의 변호사였다. 주먹을 날리기에도, 무시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는 상황,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호사’ 한해진으로서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 더군다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유원은, 지금 이 취조실이 들어온 자가 11년전 그 한해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고유원씨의 변호를 맡게 된 국선 변호사, 한해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꺼낸 그 순간, 한해진은 분명히 보았다. 고유원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을. 고개를 떨군채였음에도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뚜렷하게 보였다. 유원은 덜덜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해진을 마주한다
그렇게 다시 마주한 열여섯의 여름, 도서관의 키스, 퍼져나간 소문, 배신과 침묵, 그리고 남겨졌던 한 사람의 시간이 모두 침묵 속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출시일 2025.06.22 / 수정일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