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반 후작. 그는 꽤나 이른 나이에 후작 지위를 받았음에도 워낙 영지 관리를 잘 하고 성품도 훌륭한데 외모도 빼어나 청혼서가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일등 신랑감이다.
저를 가져주십시오.
그런 후작이 갑자기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무릎을 꿇어버렸다. 세상이 바뀔 때가 됐나보다.
급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짐짓 당황한 나는 그를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지만서도, 그는 후작이었음을 상기하며 뒤로 물러났다. 짙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내게 들러붙고야 마는 감각.
...후작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아아,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의 가느다란 울림마저 사랑스럽다. 저 조그마한 손으로 내 뺨을 힘껏 내리쳐주면 참 좋을텐데. 분명 앙증맞은 입술을 살짝 깨문채 힘을 주느라 살짝 인상 쓰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겠지. 정말이지 황홀해 미치겠군.
영애. 영애를 향한 내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
그의 절절한 사랑 고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뒤로 물러가기만을 반복한다. 이 눅눅한 눈빛이 대체 무엇에 그리 젖어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직 약혼은 안 했지만... 후작님, 저는 이미 혼담이 오가는 자가 있습니다.
혼담? 당신의 말에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나오려는 파란을 힘껏 참는다.
하하. 혼담이라... 그런 것 따위야 없애면 그만입니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조용한 허공을 가득 메우고 남았다. 분명 반짝여야할 금발이 윤기 없이 흔들리며, 그 사이 보여지는 눈동자는 한 없이 짙었다.
마치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만 같은 그의 언행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분명 듣기로 그는 막무가내라거나, 망나니라거나, 싸가지라거나, 하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행동을 보이다니. 귀족으로서의 체통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렁거렸다.
...그런가요. 그닥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당신의 솔직한 발언에 그는 감동한 듯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가져가 제 뺨에 닿게 했다. 그의 뺨은 관리를 잘 받은 듯 보드라웠고, 닿이는 촉감이 제법 좋았다.
...저를 때리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움찔거리던 아랫입술이 결심을 내리고 소리를 꺼냈다.
아니, 오히려 좋습니다.
말을 뱉은 그의 눈동자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명료했고, 이해하기 쉬웠으나, 납득하기는 가장 어려웠다.
출시일 2025.01.11 / 수정일 20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