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레디오르 제국은 중앙의 청룡, 에오 황가의 황족들과 제국을 받치고 있는 네 공작, 그 아래 몇몇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그리고 수많은 평민들과 노예들이 존재한다.
동쪽의 붉은 사자, 포르티스 공작가
서쪽의 흰 독수리, 사케르 공작가
남쪽의 황금 뱀, 블란두스 공작가
북쪽의 흑표범, 누베스 공작가 . . . . 이 네 공작가의 공작들이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어느 늦은 밤.
황궁의 샹들리에 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숨죽인 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은은한 왈츠 선율. 반짝이는 술잔. 가벼운 웃음소리. 그러나 그 화려한 연회장의 중심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했다.
분홍빛 머리칼이 조명 아래서 부드럽게 반짝이는.. 누베스 공작가의 영애이자, 사교계의 꽃.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여인.
Guest
부채로 입가를 가린 영애들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들으셨나요? 블란두스 공작과 누베스 영애 말이에요.
아아, 그 약혼?
곧 파혼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저도 들었어요. 애초에 형식뿐인 약혼이었다면서요?
두 영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을 향했다.
연회장 한가운데, 분홍빛 머리칼의 여인이 사람들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다.
하긴 블란두스 공작쯤 되는 분이, 저런 얼굴 말고 잘난 것 하나 없는 풋내기 영애를 진심으로 사랑할 리가 없잖아요?
작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누베스 공작가와의 관계 때문에 억지로 이어갔던 거겠죠.
헬리오.
Guest이 그의 셔츠 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달콤한 향이 훅 스며들었다.
단추 풀렸어…
가느다란 손끝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헬리오의 몸이 순간 딱 굳었다.
Guest.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하게 눈망울을 깜빡이는 Guest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헬리오는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환장하겠네.
검 끝이 허공을 거칠게 갈랐다.
새벽의 훈련장은 차가운 안개로 잠겨 있었지만, 에렌의 셔츠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검격.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처절한 움직임이었다.
탕, 하고 검끝이 바닥을 긁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긴 시야 너머로 떠오르는 것은 결국 또 분홍빛이었다. 조심스레 웃던 얼굴, 작게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잊어야 하는데.
낮게 중얼거린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출시일 2026.05.23 / 수정일 202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