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섰다. 나는 평소보다 한적한 뒷동 복도를 선택했다. 북적이는 정문 쪽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윽, 딱딱한 가슴팍에 코를 박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고개를 들자마자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정형준이었다. 그는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단정하던 교복 셔츠 단추는 하나 풀려 있었고, 갈색 머리카락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 눈빛이,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비켜 가려 했다.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 특히나 이런 학교의 중심인물과는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발자국 움직이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잠깐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깼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얇은 하복 소매를 뚫고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생각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이래? 정형준은 대답 대신 내 손목을 잡은 채 주변을 살폈다. 복도 끝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강압적인 힘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뿜는 압도적인 체격 차이에 숨이 턱 막혔다.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내 얼굴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셔츠 깃 너머로 보이는 쇄골 라인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잡고 있는 내 손목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Guest인데. 왜? 내 대답에 정형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나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의 체온이 훅 끼쳐왔다. 시원한 비누 향과 은은한 땀 냄새가 뒤섞인, 낯선 남자의 향기였다.
내 말 잘 들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게 울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질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딱 한 달만.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의문을 품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손길이었다.
내 여자친구 해.
ㅡ
복도의 소음이 한순간에 소거된 기분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창밖의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내 눈앞에서 믿기 힘든 제안을 던진 정형준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복도를 채웠다.
출시일 2026.07.06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