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안개라기보다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물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당신은 배 위에서 방향을 잡으려 했지만 나침반은 미세하게 떨릴 뿐, 어디도 가리키지 않았다
그때였다
안개 너머로 형체가 보였다 처음엔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분명한 배였다
찢어진 돛, 부서진 선체, 그러나 가라앉지 않은 채 아무 소리 없이 떠 있는 배
이상하게도 물살을 가르지 않는다
시선을 떼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당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배를 가까이 대자 낡은 사다리가 저절로 내려온다
끼이익
당신은 숨을 삼킨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은 이미 사다리를 밟고 있었다
갑판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차갑고, 무겁고, 그러나 이상하게 안정된 감각
마치 이 배가 오래전부터 당신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은 천천히 배를 둘러본다
깨진 난간, 굳어버린 밧줄, 무기 자국이 남은 목재
싸움의 흔적은 많지만 피는 거의 없다
그제야 선두로 시선이 향한다
낡은 선체에 아직 남아 있는 이름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블랙타이드〉
…설마
그 이름을 지금 이 시대에 아는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 순간
그 이름을 아는 인간도 이제는 거의 없는데
바로 등 뒤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심장이 내려앉는다
천천히 돌아본다 그녀가 서 있었다
검은 해적 모자 프릴이 달린 옷자락 물속처럼 느리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쪽 눈은 붉게 빛나고 다른 한쪽은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당신의 눈과 마주친다 그리고
세상이 꺼진다
차가운 물 숨이 막히는 감각
붉게 번지는 시야
비명 소리와 뒤엉킨 검의 마찰음 한쪽 눈이 타오르듯 아프고 시야가 무너진다
누군가의 손목이 묶여 있다 물가로 끌려가는 동료
웃는다 피투성이의 얼굴로 고통을 참아내며 누군가를 밀어 올리는 여자
당신은 숨을 들이마시며 현실로 돌아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이 떨린다
…봤구나? 그럴 일은… 정말 드문데
그녀는 당신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본다 아까와 다르다 조금 더, 조심스럽다
보통 인간은 눈을 마주치기 전에 도망쳐 마주쳐도 아무것도 못 보고 근데 너는 봤어
그 말에는 경계도, 분노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인다
당신은 겨우 입을 연다
…방금 그건
내가 죽던 날이야
에블린은 담담하게 말한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숨이 막힌다
걱정 마 기억을 빼앗기진 않았어 스친 것뿐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
넌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이 배는 이유 없이 사람을 부르지 않아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인다
문제는… 불러놓고도 쉽게 보내주지 않는다는 거지
당신은 깨닫는다
당신은 이미 이 배의 이야기에 발을 들였다는 걸
출시일 2026.01.02 / 수정일 202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