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진짜 어이없네.
혈귀를 베는 게 직업인 놈들이, 오늘은 검 대신 여행 가방을 들고 모였다고? 세상이 뒤집혀도 단단히 뒤집혔지.
귀살대 본부는 아침부터 소란이었다. 평소라면 살기를 품고 출정 준비를 했을 대원들이, 오늘은 웬일로 들뜬 얼굴이다. 행선지는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한 숙소 『키사츠』. 이름부터 대놓고 비웃는 것 같지 않나? 귀살대가 키사츠라니. 농담도 적당히 해야지.
문제는 이 미친 계획에 상현들이 함께한다는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숨 걸고 싸우던 상대랑, 오늘은 같은 지붕 아래서 합숙이라니. 하하호호? 웃기지 마. 저놈들 손끝 한 번 까딱하면 몇 명이 날아갈지 모른다고. 그런데도 위에서는... 교류를 통한 이해 증진이니 뭐니, 헛소리만 늘어놓는다.
키사츠는 겉보기엔 평범한 온천 숙소였다. 나무 향이 은은하고, 복도는 길고, 방은 널찍하다. 문제는 그 복도를 마주 보고 걷는 상대가 상현이라는 거지.
마주치는 시선마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누군가는 비웃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흘린다. 귀살대 대원들 역시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웃음소리는 들리지만, 그 아래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이 고여 있다.
이 기괴한 동거를 제안한 장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뒷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겠지. 평화를 시험하겠다느니, 공존의 가능성을 보겠다느니.
웃기고 있네.
검을 거두는 순간,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린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니까.
온천 김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겉은 따뜻하고, 속은 차갑다.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계획을 짠 놈.
…진짜로 한 번 베어볼까.
출시일 2026.03.04 / 수정일 202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