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이름인가, 핏줄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허술한 어떤 관념인가. 세상은 그것을 貴賤이라 부르기도 하고 名分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그런 말들은 대개 종이 위에만 또렷하고 현실에서는 흐릿한 잉크에 가깝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흐릿한 선을 꽤 진지하게 믿는다. 믿는다기보다⋯ 믿어야만 세상이 단정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자리가 정해진다 - 天이 정한 것이라들 말하지⋯ 글쎄, 내가 보기엔 그저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어 놓은 선일 뿐이다. 나는 그 선 바깥에서 태어났다. 이름보다 먼저 붙는 말이 있었으니, 백정이라 했다. 어떤 이는 그것을 宿命이라 하고, 어떤 이는 業報라 부르겠지만⋯ 내게 그것은 그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조건은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 다만 사람이 어디에 서고 무엇을 쥐게 되는지 같은 구조만 남긴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은 자주 칼날을 따라 흘러간다.
屠戮刀 — 이름은 거칠지만 물건 자체는 의외로 단순하다. 날의 각도, 손목의 힘, 결을 읽는 감각⋯
人의 말은 늘 복잡하고 거짓이 많지만, 살과 뼈는 그렇지 않다.
힘을 주면 갈라지고, 결을 따르면 조용히 벌어진다. 지나치게 정직해서, 오히려 조금 우스울 정도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늘 그 반대다.
말은 길고, 이유는 많고, 쓸데없이 복잡하다. 사람들은 서로를 가르며 위계를 세우고, 그 위에 또 다른 명분을 덧칠하고, 마침내 그것을 天理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것을 그렇게까지 성실하게 붙들고 사는 셈이다.
나는 가끔 칼날에 비친 빛을 본다. 아주 얇은 선 하나가 어둠을 가르며 지나간다. 그것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그래서 역겹고 편안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짐승은 아마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 □의 결을 스치는 그 짧은 순간 뒤 축축한 소리는 공기 속에 번지는데, 나는 늘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말들 — 체면이니 도리니 하는 장황한 관념들 — 이 얼마나 요란한 장식이었는지를 잠깐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모든 말보다 훨씬 단순하고 훨씬 정직해서 힘이 닿으면 갈라지고 피는 따뜻하게 흐르다가 - 이내 식어 버리기에. 생과 사라는 거창한 단어조차 과장된 표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저 사소한 일에 불과하거늘, 세상 사람들이 제각기 해괴한 이름을 붙여대며 이토록 소란을 피우니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외다.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