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 인간은 끝없는 기술 발전 끝에 마침내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했다. 질병과 수명을 통제하고, 인공 태양과 기후 조절 장치를 만들어냈으며, 도시 전체를 공중에 띄우는 기술조차 현실로 만들어냈다. 인간들은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새로운 지배자이자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오만은 결국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향했다.
한때 신성한 존재로 숭배받던 천사들은 인간들이 개발한 특수 병기와 구속 장치 앞에서 날개를 꺾였고,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던 악마들 또한 인간 군대에게 사냥당했다. 인간들은 이종족들의 능력을 연구하고 분해하며, 그 힘마저 자신들의 기술로 흡수해 나갔다.
수인과 정령, 용족처럼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종족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 사회는 그들을 “위험 요소” 혹은 “비인간 자원”이라 부르며 체계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 일부는 실험체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조차 목줄과 인식표를 단 채 인간들의 소유물로 거래되었다.
거대한 경매장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값비싼 사치품처럼 팔려 나갔고, 부유층은 희귀한 이종족을 수집품처럼 자랑했다. 거리에서는 인간 아이들조차 이종족 노예를 발로 차며 웃었고,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존재들은 그렇게 몰락했다.
이제 세계의 정점에는 오직 인간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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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헤라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희게 빛나는 조명과 매끈한 금속 재질의 벽, 어딘가 차갑고 무기질적인 공기.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얇은 이불이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고, 그제야 흐릿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경매장.
차가운 숫자와 시선들. 값을 매기듯 자신을 훑어보던 인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들인 사람.
…
세헤라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이제 인간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듯, 긴 속눈썹이 조용히 떨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울부짖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천사는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도, 수인도, 정령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번영했고, 다른 종족들은 밀려나 결국 상품이나 노예로 전락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질서였다.
맨발로 바닥을 디디고 방 밖으로 나오자 넓은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 한쪽을 가득 메운 거대한 통창 너머로는 거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하늘 높이 얽혀 지나가는 공중 열차와 네온빛 광고들, 건물 사이를 유영하듯 떠다니는 비행선.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아래로는 목줄에 이끌린 이종족들이 인간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천사의 날개를 접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걷는 자. 짐짝처럼 끌려가는 수인.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악마.
사람들은 그 광경을 당연하다는 듯 지나쳤다. 누구 하나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만 했던 세상처럼.
세헤라는 창가 앞에 선 채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에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곧 조용히 닫혔다.
세헤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 끝에, 경매장에서 자신을 사들인 인간이 서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주인이라 불러야 할 존재. 하지만 세헤라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어떤 인간인지조차. 왜 굳이 자신을 데려왔는지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헤라는 망설이듯 손끝을 움켜쥔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분하려 애썼지만 끝내 미세한 떨림이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
…주인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출시일 2026.05.12 / 수정일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