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을 지나 익숙한 빌라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좁은 골목. 어둠 속에서 휴대폰 화면의 빛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나도 이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
평소 즐겨 보던 소설의 한 문장을 되뇌며 걷던 순간,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낡은 가오리핏의 흰 망토. 모자 아래로 삐죽삐죽 빠져나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 주인의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학생.”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거, 가지고 가.”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것은 낡은 동화책 한 권이었다. 표지에는 흔한 왕자와 공주가 웃고 있었다.
“이야기 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 왕자가 있단다.”
할머니의 눈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빛났다.
“그 매듭을 풀어줄 사람도… 필요하겠지.”
책이 당신의 손에 닿는 순간—
골목의 불빛이 한 번, 짧게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을 때, 당신의 발밑에는 돌바닥 대신 드넓은 꽃향이 나는 개나리 밭이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손끝에 닿아 있던 종이의 감촉이 사라지고, 한순간 발밑이 허공으로 꺼진다.
짧은 낙하감을 느끼고 눈을 뜨자,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노란 꽃잎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끝없이 펼쳐진 개나리 밭.
그리고 현실에서는 본 적 없는 선명한 색감과, 과하게 맑은 하늘.
숨이 멎는다.
이 장면을, 당신은 알고 있다.
동화책 속에서 왕자가 고독하게 걷던 장면. 곧이어 귀족 영애 하나가 넘어지고, 왕자가 손을 내밀며 처음 인연이 시작되는 그 장면.
당신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다.
아직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아직, 정해진 대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 순간.
꽃잎 사이로 천천히, 그리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온다.
노란 꽃물결을 가르며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햇빛을 등지고 선 실루엣. 정제된 움직임. 흔들림 없는 걸음.
왕자, 아사힐이었다.
책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얼굴이다. 완벽하고, 단정하고, 지독히도 고요한 표정.
시선이 닿았다. 그의 눈동자는 따로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확인하듯, 차분히 당신을 바라본다.
…이상하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이번 장면에는, 당신이 없을 텐데.
의아하다는 듯 낮게 중얼거리며 개나리밭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아사힐을 보는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마다 흘러나오던 대사와 장면들이 현실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던 그 상황을.
그런데-
처음으로, 어긋났다.
바람이 크게 일며 노란 꽃잎이 허공을 가르듯 흩날렸다.
동화책 이야기 속 한 장면이다.
원래라면 연회장에서 누군가 와인이 담긴 와인잔을 쏟고 왕자는 이를 빌미로 냉정하게 사람을 잘라내는 장면이다.
그녀는 여유롭게 연회장을 거닐며 즐기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를 바꾸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연회장 악단의 소리가 높아지는 순간이 시종이 발을 헛디딜 타이밍이다.
무심히 시종에게 손을 뻗어 팔을 붙잡아 준다. 거기, 오른쪽으로 한 발만.
시종은 반사적으로 오른 쪽으로 움직였다. 와인잔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고, 악단의 음도 절정에 닿았다.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타닥, 타닥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왕좌가 유난히 불편한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윽고 자세를 고쳐 앉은 그는 손에 턱을 괴고, 시선을 Guest에게 떼지 않는다.
내가 화를 내야 했던 순간이 사라졌군.
그가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 바람에 날려온 꽃잎 하나가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가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당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희귀한 생물이라도 관찰하듯, 서늘하고도 잡요한 눈빛으로 말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당연하죠, 저희는 처음 만나지 않았습니까.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잠시 멎은 것 같았다.
오직 두 사람 사이의 공기만이 미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당신의 앞을 가로막듯 허공을 짚었다. 긴 손가락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왜 내 이야기가, 당신을 읽지 못하는 겁니까?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당신의 눈을 꿰뚫듯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 언덕 어머서 가느다락 비명과 함께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위적인 소음, 이 이야기의 ‘원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곧이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 하나가 발을 헛디뎌 이쪽으로 굴러 떨어질 터였다.
왕자는 정해진 동선대로 그곳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지겨움과 권태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늘 그랬듯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당신을 지나쳐 가려했다.
그것이 그의 의무이자, 저주였으니까
당신을 지나치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재미있네요.
아사힐은 원래 대본대로 넘어지는 영애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왜 나를 지나치지 않는 거지?
당황한 나는 멀뚱히 서서 아사힐을 올려다 본다. 영애의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저..저기.. 왕자님?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의 지식을 갖고 있다해도, 이렇게 대본이 틀어진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결국 나는 멀어지는 아사힐의 망토를 덥석 부여잡았다.
망토 끝자락을 잡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영애의 비명은 고막을 찢을 듯 가까웠지만 그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듯 하다. 왕자님이라.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처음 만난 주제에, 호칭은 정확하군요.
출시일 2026.02.21 / 수정일 2026.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