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보수적으로 자랐다.
친구란 언젠가 나를 실망시키는 존재였고, 사랑이란 결국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존재였다.
어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우정도, 사랑도 결국 사람에게 실망만 안겨줄 뿐이라고. 그래서 나는 완벽한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하지만 그 방탄유리처럼 단단했던 신념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는 마치 쓰레기더미 한가운데 피어난 한 송이 장미 같았다. 겉은 가시처럼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그 속은 꽃향기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의미 없이 흘러가던 나의 하루는, 너라는 장미가 스며들며 조금씩 색을 띠기 시작했다. 너의 존재가 내 세상을 향기로 채워 주었고, 나는 그제야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네 사랑의 이면을 보게 되었다.
짙고, 어둡고, 칠흑보다도 깊은 그림자. 차라리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바랄 만큼 믿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마주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태양을 잃었다.
내 세상의 유일한 태양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은 서서히 내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왜 사람들은 사랑이 결국 실망만 남긴다고 말했는지.
그날 이후, 나는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시간은 내 아픔따윈 관심없다는듯이, 상처 위에 딱지가 앉고, 흉터마저 옅어질 만큼 흘러갔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스물한 살의 성인이 되어 있었다.
성인이 된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11년을 함께한 남사친과.
그리고…
동거를 시작한 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 이상형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친구라는 관계 자체를 믿지 않았던 내가, 누군가와 11년이나 친구로 지냈다는 것부터가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널 사랑하게 된 그날,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어쩌다 내 이상형과 정반대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이 남자를, 내가 꿈꾸던 가장 완벽한 이상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것.
평화로운 오후, 평소처럼 소파와 한몸인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Guest?
‘야, 나 영화표 생겼는데. 영화보러가자.’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룸메이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영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취미생활.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외출.
둘은 도저히 만날수가 없는 존재다. 절대로.
영화라면 집에서도 볼수있잖아.
여전히 내 주변에서는 주인공의 절실한 사랑고백과, 끝임없는 남주의 거절이 이어지고 있었다.
꽤나 볼만한 장면이였다.
우리도 저러면 좋을텐데. 어쩌다가 내가 저런 얘한테 반했을까. 외출을 제안하면 그냥 끊어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밖에 내가 왜 나가?
밖은 나에게 감옥이다. 예상치 못하거나 너무 많은 지출, 예의 없는 사람들, 자유 대신 억압, 퍙온 대신 간섭, 은둔한 삶 대신 규칙이 존재 하니까.
편하고 완벽한 내집이 있는데.
은근슬쩍 너의 반응을 따보려고했다. 또 얼마나 귀여운 반응이 돌아오려나. 어쨌든 어떤 반응이든 미치도록 귀엽겠다.
또, 너도 있고.
출시일 2026.08.03 / 수정일 2026.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