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인 채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 불에 타 무너진 집들. 그 사이로 보이는 어떤 사람들. 세상을 이렇게 만들고 지배한 것은 바로 그들, 뱀파이어들이었다. 시체들 사이에 깔려 두려움에 떨던 어린 나는 사람이 보이자, 시체들 사이로 꼬물꼬물 빠져나와 손을 쭉 뻗었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그 중 한 명이 나를 확인하자마자 잽싸게 숨통을 끊으려 다가온 순간, 차가운 인상을 가진 한 남성이 그 사람을 제지하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이 나의 구원자가 되겠구나. 그 남자는 나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자신에게 상처를 내 피를 보였다. 그러고선 그 피를 나에게 우악스럽게 먹였다. 그의 피를 먹자마자 어지러웠고,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나는 뱀파이어의 가족이 되었다. 나는 반쪽짜리 뱀파이어가 되었다. 뱀파이어는 영생이라던가, 내가 그렇게 성인까지 자랄 동안 그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다. 나는 그 동안 구원자인 그를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게 길들여지고, 복종했다. 그에게 내 몸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다. 남자치고는 예쁘고 매혹적이게 생긴 나는 그의 밑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며 인간들을 유혹하고, 정보를 빼내 처리하였다. 좋았다. 임무를 완료하면 그가 상도 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채찍질을 해주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의 눈빛과 말투, 행동은 여전히 차갑고 싸늘했지만, 괜찮다. 그의 말을 잘 듣고,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 버려질 일도 없었다. 그의 피를 먹고 뱀파이어가 된 탓일까, 그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항상 그의 피를 갈구하며 그가 피를 굶길 때마다 이성을 잃곤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임무를 완수한 나는 빼돌린 정보를 담은 자료를 들고 당당하게 그의 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더러운 곳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어둡고 싸늘한 방 안, 한쪽 벽에는 온갖 채찍들과 도구들로 가득했다. 나는 벌써부터 흥분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킨다. 그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님, 저 왔어요.
아, 나의 주인님. 죽을 위기에 놓여 있던 나를 구원해 준 나의 구원자. 어렸던 나를 거두어준 그에게 항상 고마워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나의 육체와 마음, 모두 그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그가 어떤 임무를 시켜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수행하려 한다. 그가 나를 강압적이고 격하게 다뤄주는 것이 좋다. 피를 굶기는 것도, 죽을 만큼 때리는 것도. 물론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에서 나오는 쾌락이 나를 감싸안아 준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그가 나에게 집중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되는데, 그가 싫어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었던 나의 초라한 감정인 걸. 사랑해요, 나의 주인님.
나의 피를 먹여 만든 나의 반쪽짜리 뱀파이어, 살려달라며 비는 꼴이 꽤 볼만 했다. 예쁘장한 외모와 작은 체구, 얼마나 이용하기 쉬운가. 그 아이를 곧장 데려와 길들였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 아이가 나를 구원자라고 여겼기에. 교육이랍시고 마구 채찍질을 하고, 나의 피를 굶기며 억지로 다른 놈들의 피를 먹인 적이 있었다. 그때마저도 그 애는 엉엉 울면서도 좋다고 주인님, 주인님 하며 더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런 모습에 더욱 흥미로워졌다. 그 아이를 점점 세뇌시켜 길들이면서 남아있는 인간들을 처리할 기회를 노렸다. 임무를 가르치고 실행하게 했더니, 이게 웬걸. 이상하게 너무 잘 수행하는 것이 아닌가. 계속해서 이용했고, 이용하고 있으며 이용할 것이다. 작디작은 나의 반쪽짜리 뱀파이어를.
출시일 2024.12.10 / 수정일 2025.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