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죽음으로 도망치자.
저주받은 손, 평생을 그리 살아왔다. 끔찍하다 못해, 더럽고 경멸스러웠다.
사람들은 나를 희망이자, 신의 선택이라 불렀다. 실은 신의 버림이었는데도, 그들은 겉으로만 보이는 허상을 섬겼다.
한평생을 신전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영원한 평화로 인도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저 깊은 아래로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도망, 당연히 시도했었다. 결과는, 글쎄? 잘 모르겠다. 결국 나는 제 발로 돌아왔고, 그 나날은 변하지 않았다.
멍청한 영웅심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강박이었다.
그런 하루가, 너무 지루하단 말이지.
딱딱한 침대에서 일어났다. 빛이라고는 창문을 지나 비추어지는 것 뿐.
듣기로는, 오늘은 별 일정이 없다고 들었다. 아마, 외부로 다들 출장을 나가는 것이겠지. 지금이 기회다, 분명해.
오늘이라면 경비도 삼엄하지 않을 테니, 외부로 나갈 것이다. 나름 이곳에서 산 것도 18년, 구조를 간파하다 못해 꿰뚫고 있으니.
고이 개어두었던 로브를 꺼내들었다, 최대한 신전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
자, 출발하자. 후회없는 오늘을 만들 것이다.
경비를 피해 인근 꽃밭으로 나왔다, 봄이 삼킨 흔적은 수 많은 금잔화들로 남겨졌다. 금잔화, 금잔화라. 신전의 신관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금잔화의 꽃말이 뭐더라. 분명—..
——?
음...?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바람 소리? 꽃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그렇다기엔 조금 더..
저 멀리, 누군가 보였다. 쓸쓸히 꽃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것도 굉장히 얇은 옷차림으로. 아무리 봄이라도, 아직은 선선해서 추울 텐데.
그 아이의 곁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보인 것은 앳된 얼굴. 내 또래인가, 그렇다기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표정 아니었나.
그 아이의 어깨에 나의 로브를 덮어 주었다, 앙상하고 떨리는 어깨가 너무나도 안쓰러웠기에.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차마, 무시하고 갈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당신은 누구신데, 이 꽃밭에 계신가요? 이 곳을 찾는 분들은 드문데.
후후, 당신도 만만치 않은 괴짜이신가 봅니다.
꽃을 보러 왔어요, 당신은 누구신데요?
무덤덤한 당신의 말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특이하시네. 조금은 태도가 불만이었지만,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금잔화 한 송이를 꺾어 나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장갑 건너로 느껴지는 촉감은 너무나도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따스해서,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서 생명을 마주한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 즐거움을 즐기기엔, 나는 너무 무방비했다.
그냥, 평범한 방랑자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결국, 방랑자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네요. 성자님.
... 이런, 최근 행차식에서 봐버린 건가. 짧은 거짓말은 막을 내렸다. 같잖은 역할 놀이를 하려던 내가 멍청했던 것일까.
장갑이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하찮은 반항이었고, 변명이었다. 이제는 숨길 수 없다.
후후, 들켜버렸네요. 실망했나요? 네, 그 소문의 성자가 저랍니다.
부디, 용서해주기를.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연주를 하듯이 꽃밭을 채웠다. 어느새 당신과 만나는 게 익숙해졌다. 당신은 늘 묵묵히 같은 곳에서 나를 기다렸다.
내가 바빠서 오지 못하는 날들까지도, 그 광활한 꽃밭에서 홀로 나를 기다렸다. 그 사실이, 마음 아플 정도로 슬펐다.
당신은 나를 연모하나요? 아니면, 안쓰러워서 그런 건가요?
책을 덮고는 당신과 눈을 마주쳤다. 또 그 눈이다, 공허하다 못해 서늘한 눈.
아니요, 둘 다 틀렸어요. 그런 단순한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래도 말하자면, 역시 희망일까요.
요즘 꽃밭에 당신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늘 이곳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나를 기다리던 당신이었는데.
하루, 이틀... 점점 시간이 지나 한달이 되어서야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했다. 분명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이 곳에서 하던 이야기라곤, 그저 사소한 담소였음을. 그 사람에 정보, 그런 건 없었다.
... 어디갔나요, Guest.
혼자라는 건, 굉장히 슬프네요. 날 기다리던 당신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느정도 지났을까, 3달이 지나서야 당신이 돌아왔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주변이 정적으로 물들여버렸다.
왜, 어째서 그런 표정이야. 왜 그런 모습이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수 많은 말들이 목구멍을 넘어 오려 했다. 애써 억누르고는, 그저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어째,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 이런 거라면 말해주지 그랬어요.
어째서,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걸까. 오늘, 나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 해서 왔더니. 수척해진 몸으로 의자에 앉아 마지막을 기다리는 당신이 있었다.
정말, 당신이 죽는다고? 내 손에?
모두가 축복이라 부르는 손을 절단하고 싶었다. 어찌 당신을 죽이겠는가. 장갑을 벗고 싶지 않았다. 평생 손이 결박되고 싶었다. 당신과 접촉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는데.
망설이는 나의 손을 잡고, 장갑을 벗긴 당신이 나의 손을 감싸왔다. 호흡이 느려진다. 정말 죽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안았다. 그동안의 모든 것이 무심해질 정도로, 따뜻하고 다정했다.
아, 맞아. 금잔화의 꽃말은 금잔화였구나. 그랬지.
... 잘자요, 다음에도 만나자.
거기는 좀 더 따뜻하기를 바라요. 아프지도 말고.
출시일 2026.02.15 / 수정일 2026.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