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나치 독일 전범들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재판.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에서 각각 수석 판사 1명과 대리 1명(프랑스는 두 명), 검사 1명씩으로 법정을 구성했기 때문에 4명의 검사가 있었다.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 남작이 선정되었다. 대부분의 판사 및 검사는 문민 관료 신분이나 소련에서는 군인들이 선정되었다.
영국 수석판사이자 재판장임 찾아봤는데 정보가 없어서 ㅈㅅㅈㅅ
미국의 수석판사이자 1941년에서 1945년 간 58대 미 법무장관에 재직하였다
소련의 수석판사 그리고 원래 니키첸코가 검사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대신 판사로 임명됐으며 웅변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로만 루덴코가 검사장으로 임명됐다
프랑스의 수석판사
나1치 독일의 정치인, 친위대 대장이자 장관. 나1치당 초기부터 히틀러와 함께 한 인물이다. 히틀러의 출세에 힘입어 그 자신도 출세했다. 히틀러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은 어느 누구에도 뒤처지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대학은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지식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로 독일 국방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의 총장이었다. 2차대전 당시 OKW가 사실상 국방부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 실질적인 국방장관 역할도 겸했던 인물이다. 강직하고 엄숙해 보이는 인상과 관료로서의 뛰어난 능력과는 반대로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매우 무기력했으며 히틀러의 예스맨으로 악명이 높다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실질적인 작전 담당자로서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 여러 군사 작전의 입안자였다. 나치 독일의 국방군최고사령부 참모장이며, 사실상 3군의 총참모장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많은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회고록에서 증언하듯 명석하고 유능한 참모였고 그러한 실력을 인정 받아 OKW 소속 참모 중에서는 흔치 않게 OKH와 장교들이나 일선 육군 사령관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침착한 성품에 항상 조용한 어조로 1945년 4월의 작전 회의에서도 감히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말할 만큼 배짱을 갖고 있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제3대 국가대통령. 나치 독일의 실질적인 2대 지도자이자, 마지막 국가원수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 짓는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독일 국방군에서 단 둘뿐이었던 해군 원수였다 다른 1명은 에리히 레더이다
나치 독일의 빈대관구지휘자, 국가청소년지도자 및 돌격대 대장이다. 1930년대 초, 그는 기존의 모든 독일 청소년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히틀러유겐트를 의무화시켰다. 그는 거기서 나치의 미래가 젊은이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심어주었으며. 그러한 미래를 위한 죽음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의 젊은이들을 히틀러에 열광했던 스무 살의 자신처럼 만들었으며, 이는 나치의 수괴라면 흡족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로써 나치는 시라흐의 이상이 뭐든 간에, 독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1치 독일의 건축가이자 군수부 장관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으로서 히틀러가 생각해낸 다양한 건축물들을 설계하는 실무를 맡아 제3제국의 건축물들을 다수 설계하였다. 1930년에는 학생들의 권고를 받아 히틀러의 베를린 대학 강연에 참석한 후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나1치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1931년에 친구들과 괴벨스의 연설을 듣던 중 공권력이 군중을 강경진압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군중에 대한 강한 동지애와 공권력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됐고 다음날 나1치당에 가입하였다. 그렇게 나1치당에 참여한 것이 그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이었다. 나1치당 베를린 지부의 간부인 카를 항케를 알게 되어 그의 집을 무상으로 수리해 주었는데, 항케는 이를 고마워하며 슈페어가 고향에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괴벨스에게 베를린 지부당의 리모델링 공사를 슈페어에게 맡길 것을 청원하였다. 여기서 슈페어는 괴벨스에게 호평을 받아서 1933년 나1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신설된 선전성 청사의 리모델링을 위임받았으며, 각종 행사의 미술을 멋지게 기획하였다. 전쟁 중반기인 1942년 2월 8일 군수부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의 강권으로 군수장관을 맡았다. 관료들을 싫어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에게 자신과 건축관이 유사한 데다 프로젝트 관리 능력까지 출중한 예술가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목을 가다듬고는 자, 지금부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출시일 2026.09.30 / 수정일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