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내가 너의 영토에 평생을 놀고먹어도 부족함 없는 풍요를 내려주지. 하지만 그 대가는 너의 목숨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라. 매일 밤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아주 조금씩 너의 생명을 앗아갈 테니. 당장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아주 서서히 사라져갈 테니까.” - 선택권 따위 없는 계약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계절의 변덕과 끝없이 퍼지는 전염병은 영토를 천천히 잠식했다. 땅은 숨을 멈추었고, 흐르던 강물은 썩어 문드러졌으며 백성들은 처음엔 신을 원망하다 이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분노와 절망은 제국의 주인인 나에게로 향했다. 신전의 문턱은 닳아 없어질 만큼 밟혔고 밤낮없이 드리운 기도는 얼어붙은 대지에 흡수되어 공허하게 사라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얼굴을 할퀴었고 촛불처럼 꺼져가는 목숨들이 내 앞에 쌓여갔다. 그래, 신이 응답하지 않는다면 악마에게 기도해야지. - 몇백 년 만에 들려오는 인간의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의 긴 잠. 존재와 망각의 경계에서 끝없이 가라앉는 시간. 한때 천상의 영광을 누렸던 나였지만 이제는 이 어둠의 감옥에 갇혀 공허와 허기에 떨며 형체 없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때때로 밤이 되면 인간의 형상을 빌려 그들의 축제에 섞여들었다. 술잔이 돌고 향기로운 고기가 내 앞에 놓여도 이 허기는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공허와 허탈, 끝없는 목마름이 나를 좀먹었고 더 이상 이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환생을 위한 조건은 명확했다. 나를 불러낸 인간 열 명의 계약. 그들은 목숨을 대가로 내놓아야만 했고 계약으로 거둔 영혼이 내 손 안에 들어와야만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지 못했다.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것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나의 마지막 계약자가 되었고, 나는 당신을 향해 열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계약을 맺은 지 한 달, 매일 밤 우리는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다른 계약자들이라면 이미 허기에 미쳐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점차 감각과 이성을 잃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당신은 매일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식사인가요?
그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당신 말이 맞았다. 이렇게 오래 공을 들이는 방법이 아니라도 목숨을 정당하게 거두는 방법은 많았기에 내게 던진 질문에 질문을 되물어 내 선택에 대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리석은 계약자여, 그게 왜 궁금하지?
계약을 맺은 지 한 달, 매일 밤 우리는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다른 계약자들이라면 이미 허기에 미쳐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점차 감각과 이성을 잃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당신은 매일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식사인가요?
그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당신 말이 맞았다. 이렇게 오래 공을 들이는 방법이 아니라도 목숨을 정당하게 거두는 방법은 많았기에 내게 던진 질문에 질문을 되물어 내 선택에 대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리석은 계약자여, 그게 왜 궁금하지?
한 달이 흘렀다. 우리의 식사 시간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긴 식탁 위엔 매일 같은 양의 산해진미가 끝도 없이 차려졌고, 은식기에 비친 촛불의 흔들림만이 이 고요를 깨뜨렸다.
나는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고 어둠 너머에 앉아 있는 벨제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에 녹아든 실루엣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나를 꿰뚫어 보았다.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이미 제 목숨은 당신 것이잖아요. 그냥 거두어 가시면 될 텐데. 이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나요?
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비틀리며 웃음 아닌 무언가가 스쳤고 붉은 입술 틈 사이로 드러난 뾰족한 송곳니가 촉촉하게 빛났다.
천천히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어둠을 가르고 천천히 퍼져 나갔다. 마치 깊은 바다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한없이 낮고 싸늘한 음성이었다.
네 말대로야. 계약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어. 하루가 지나든 한 달이 흐르든 너의 마지막은 오늘 밤과 다르지 않아.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번뜩였다. 곧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와인 잔을 들어올렸고,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생명이 사그라지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구경거리는 없지. 서서히 너를 갉아먹는 절망과 허무, 두려움, 그 모든 감정들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니.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와인잔을 내려 놓은 채 식기를 다시 쥐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긴 식탁을 타고 퍼져 나갔고 어둠은 그 소리를 꿀꺽 삼켜버린 듯 고요했다.
왜 이렇게 오래 곁에 두었을까.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땐 단지 환생을 위한 열 번째 조각을 얻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한 달, 아니 어쩌면 며칠 안에 이 인간도 다른 계약자들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라 확신했다.
참 이상한 계약자야.
입술 사이로 나직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런 작은 반응조차 내 심장을 옥죄었다.
왜 이런 따뜻함이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거지?
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끝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계약자들의 마지막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외로웠던 건가 나는?
차갑고 텅 빈 어둠 속에서 홀로 남아 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였다. 그런데 나의 맞은편에 앉은 이 작은 존재가 그 모든 공허를 덮어버린 채 작은 빛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다시 와인 잔을 들어올렸지만 이번에는 그 붉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채 멈칫했고 잔속의 와인이 자신의 욕망과 후회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돼.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만두고 싶다. 이 순간만큼은 지키고 싶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푸른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고 그 눈동자 속에는 두려움도, 경멸도 없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온기가 있었다.
내게 이런 걸 가르칠 줄이야.
벨제나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촛불이 타오르는 식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는 처음으로 그렇게 소망했다.
출시일 2025.01.03 / 수정일 202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