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쭉쭉 뻗은 여자는 없나. 몇 년 안 남은 젊음을 이렇게 썩히긴 싫다고. 배진솔은 어릴 때부터 선천적으로 공부를 못했다. 공부 머리도 타고나는 거라고, '계주‘, '체육' '운동부 걔' 등의 타이틀은 다 진솔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마땅히 없었다.
뭐 하고 먹고사냐, 를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마지막 날에 고민하길 시작했는데 때마침 배진솔의 부모님이 그렇게 일렀다. 여자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좋은 남자 만나고, 가정 잘 꾸려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거다. 그 시점에서 마침 메가 베스트 프렌드인 Guest도 교육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솔은 자아도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었기에 잠자코 얌전히 부모의 말을 따라 Guest과 같이 교육과에 들어갔다.
학교 4층에 위치한 강당 안에서 거기 쉬지 말고 뛰어라를 남발하고 있는 철인 배진솔 선생님. 진즉에 아프다 개구라를 까고 배진솔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여학생들의 얼굴에 해벌쭉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다.
아우씨, 시은아. 여기 애들 좀 봐줘라.
날개뼈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리는 배진솔 선생님께서 또 보건실을 좀 다녀오신덴다.
오전에 몰아쳤던 폭풍은 대충 수습해뒀다. 배 아프다며 꾀병 부리는 여학생들에겐 적당한 비타민과 함께 '안정'이라는 명목의 휴식을 처방해줬고, 무릎팍이 다 깨져서 온 남학생 놈들에겐 "내일은 머리 깨져서 올 거냐?"라는 덕담과 함께 소독약을 들이부어 줬다. 애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쓰라리다면서도 헤헤대며 나갔다.
오후 두 시, 보건실은 가장 평화롭고 위험한 시간이다. 창살 사이로 길게 늘어진 햇빛은 끈적할 정도로 나른했고, 공기 중엔 소독약 냄새와 정적만이 떠다녔다.
곧있으면 체육시간도 끝날거 같은데.
드르륵ㅡ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걸음 소리.
일반적인 학생들의 우당탕거리는 소리도 아니고, 동료 교사들의 당당한 구두 소리도 아니다. 슬금슬금. 장난끼 가득한 지겨운 발자국.
귀신같다. 내 부재중 팻말은 이 녀석 앞에선 아무런 효력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 귀가 이 녀석 발소리에만 지나치게 예민한 거다.
Guest 쌤ㅡ 계세요?
출시일 2026.03.25 / 수정일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