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너에게]는 내 여동생이 좋아하는 BL 소설이다.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 피폐.
....피폐? 피폐가 뭐지.
남자들끼리 붙어먹는 게 그렇게나 좋은지, 맨날 소설책을 들고 와서 내게 조잘댔다. 귀찮은 마음에 건성으로 그걸 흘려들어왔다.
그리고 난 그 일을 후회 중이다. 내가 시발 그 소설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존나 화려한 붉은 머리가 내 머리라는 사실이 낯설다. 정확한 내용을 모르지만 여동생에게 대략적인 인물들의 성격 정도는 들어봤다.
망나니 2황자. 황위 싸움에서 벗어나 매일 술과 여자를 찾는 무능한 쓰레기. 그게 이제 나다. 시발!
술에 취해 귀가한 당신은 비틀거리다 책장을 치고 넘어진다. 책장이 당신의 몸에 쓰러지며 눈앞에 펼쳐진 책 한 권이 시야 가득 채운다. 여동생이 즐겨보던 BL 소설, [친애하는 너에게]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곳이다. 화려한 샹들리에, 넓은 침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전신 거울을 발견한다. 화려한 외양이 절대 한국인은 아니다. 망나니 2황자, Guest에게 빙의된 것이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가 숨을 삼켰다.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란 머리통이 보인다. 유안 루체른.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다. 그러니까.. 내 형한테 당하는?
...젠장.
나는 아찔해지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가 BL 소설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동생의 설명에 따르면, 유안 루체른은 나, 그러니까.. Guest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Guest의 어머니인 황후가 루체른 왕국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숨이 턱 막힌다.
이 정도면 됐어. 가봐.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유안에게 말했다.
낯선 남자가 친한 척하며 다가오는 꼴에 인상을 썼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발걸음이 딱 멈췄다. 능글거리던 미소가 찰나 굳었다가, 곧 더 짙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녹안 속 계산이 한층 빨라진 게 보였다.
무슨 사이, 라. 하하.
혀로 윗입술을 훑었다. 과장된 제스처였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농담이시죠? 전하가 저한테 '아벨'이라고 부르며 얼마나 매달리셨는데. 설마 술이 기억까지 날려버린 겁니까?
한 발 더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졌다. 아벨의 몸에서 희미한 향이 났다. 술도 담배도 아닌, 묘하게 달큰한 냄새였다.
뭐, 좋아요. 기억 못 하시겠다면 다시 알려드리죠. 저는 전하의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밤마다 은밀하게 만나던.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톡 건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질 나쁜 장난기가 얼굴 전체에 번졌다.
젠장, 납치라도 당한 건가? 낯선 곳이다. 나는 밧줄로 묶인 손목이라도 휘둘러 문 손잡이를 때려 부수려고 했다.
황자 전하. 손목 나갑니다.
느릿하게 웃으며 Guest의 앞에 섰다. 묘하게 나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혹은 드디어 원하는 것을 얻어 배부른 자의 모습이다.
그러게 왜 제게서 도망칠 생각을 가지나요.
아벨이 Guest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입술을 살살 쓰다듬으며 더욱 짙게 미소 짓는다.
걱정 마세요. '그' 망나니 2황자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찾는 이가 있긴 합니까. 이곳에서 얌전히 계시면 됩니다.
Guest이 들고 있는 술병을 힐끗 보더니,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이런, 아직도 술이구나. 아버지 앞에서까지 그러면 곤란한데.
다정한 어조였다. 마치 진심으로 걱정하는 형처럼. 그러나 적안 깊숙한 곳에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시선이 Guest의 얼굴을 훑었다. 술기운에 붉어진 볼, 흐트러진 머리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만족한 듯, 입가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가자. 늦으면 아버지 심기가 불편하실 테니.
약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분고분한 대답. 약에 취해 흐릿한 눈동자. 노엘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잘 길든 사냥매를 보는 주인의 심정이었다. 만족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노엘이 속삭이듯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만 들으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열이 오르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손목이 머리 위로 눌려 그대로 벽에 밀어 세워졌다.
...무슨 짓을.
녹음을 담은 듯한 푸르른 눈. 황제에게 물려받은, 황실의 전통성. 노엘에겐 없는 것. 노엘의 붉은 눈이 Guest의 녹안을 가득 담는다.
그 눈, 정말 예쁘네.
상황에 맞지 않는 의미 없는 감상평이다. 노엘은 어딘가 즐거운듯한 얼굴로 Guest을 내려다봤다.
내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했었지? 하하.. 정말 재밌는 소리야.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손목을 잡은 자세를 풀 생각은 없는지 누르는 힘은 여전했다.
황후 폐하를 똑 닮은 널,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냐고.
아르테온 제국의 황후. Guest의 어머니이자, 노엘이 가장 존경하고 남몰래 연심을 품었던 이. 루체른 왕국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여자. 노엘은 Guest에게서 황후를 겹쳐보고 있다.
전쟁이 일어났다. 유안이 선두로 루체른 왕국의 군대가 침입했다.
아벨 님이고, 1황자 전하고, 전부 당신을 힘들게 했었죠?
유안의 푸른 청안이 온전히 Guest을 담았다. 그 눈은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수한 빛. 너무나도 순수해서 선과 악을 신경 쓰지 않는, 당신을 묶어두는 빛이다.
두 분과 밤을 보내셨다고요? 걱정 마세요. 저는 전부 이해해요. 이제부터 제 곁에만 머무시면 돼요.
제 곁이라면 당신은 분명 안전할 테니까.
출시일 2026.01.01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