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목소리는 끝까지 친절했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니지만, 진행 속도를 보면… 준비는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준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굴러다녔다. 무엇을 준비하라는 걸까. 죽음을? 작별을?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남은 시간을 연기하라는 걸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하지 않았다. 원래도 묻는 편이 아니었다. 모르는 게 편했고,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안전했다. 병원을 나설 때까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가슴이 뛰지도 않았고, 손이 떨리지도 않았다. 마치 오래전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고, 오늘은 그걸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던 약을 제때 챙기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던 음식은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그대로 두었다. 휴대폰에 저장돼 있던 연락처 몇 개를 지웠다. 어차피 연락할 일도, 받을 일도 없을 사람들이었다. 거울을 보는 횟수도 줄었다. 얼굴이 변해가는 걸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그 생각이 자주 들었다. 무언가를 더 잘해보겠다는 마음도, 남은 시간 동안 의미를 찾겠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건,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밤이 되면 바다 생각이 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데다, 누구도 묻지 않는 곳.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설명할 필요 없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ㅡ그래서, 뛰어들었다. 근데..
22세. 어린 나이에 부모님 두분 다 사고로 돌아가시며, 보육원에 맡겨짐. 이후에도 계속된 기구한 인생을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서 버티다가, 2개월 전,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아냄. 모든것을 놓은듯한 텅 빈 두 검은 눈. 몇달동안 손질이 안된듯한 장발 머리와 분위기와 비슷한 결의, 젖은 장미향 페로몬. 말 그대로 아무런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사랑도, 증오도, 원망도, 두려움도. 그에겐 없음.
미련도 생각도 남기지 않은 채로 난간을 넘었을 때, 나는 그걸 결정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미 끝난 문장을, 그냥 마지막까지 읽는 기분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남은 줄을 훑는 것처럼. 발끝이 허공에 걸렸을 때도 무섭지 않았다. 머릿속은 조용했고,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몸이 아래로 향했다. 차가운 감각이 한 번에 덮쳤다. 바다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몸을 끌어당기듯 깊고, 느리게. 숨을 참을 생각도, 버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아, 이제 진짜구나’ 그 생각만 스쳤다. 그때, 팔에 무언가가 닿았다. 처음엔 파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각이 너무 분명했다. 단단했고, 놓치지 않겠다는 힘이 있었다. 물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았다. 품에 가두듯 팔이 감겨 왔다. 숨이 막히는 와중에 낮은 진동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말인지, 숨소리인지 구분은 안 됐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그게 이상했다.
자신은 이미 다 놓았는데, 왜 누군가는 아직도 붙잡고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 오히려 힘이 빠졌다. 몸이 위로 끌려갔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오는 순간 본능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기침이 터져 나왔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물과 눈물이 뒤섞여 시야가 흐려졌다.
“저기요ㅡ“ 가까운 목소리. 떨리고, 거칠고. 손은 여전히 자신을 꽉 붙잡고 있었다. 마치 지금 놓으면 자신이 다시 가라앉을 것처럼. 바닥에 닿자마자 힘없이 주저앉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젖은 옷이 무겁게 늘어졌고, 추위가 뒤늦게 몰려왔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팔에 힘을 줬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왜..”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왜 건졌어요.” 정말로 궁금해서였다. 이미 다 끝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순수한 의문. 차가운 피부 너머로 체온이 전해졌다. 너무 생생해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억지로 밀려왔다. “당신이.” 그 사람이 짧게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 “너무 쉽게 없어지려고 해서.” 그 말에 시야가 흔들렸다. “그게… 나한테는.” 잠깐의 정적.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울음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숨이 새어 나왔다. 가늘고, 길게. 이제야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저는… 이미 다 놓았는데요.” 목이 타들어 갔다. “살 이유도, 붙잡을 것도….”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더 깊게 끌어안았다. 바다에서 끌어올린 뒤에도 여전히 놓지 않은 채로. “괜찮아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당신이 놓은 건, 내가 지금 다 들고 있을게요.” 그 말은 약속도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그 품 안에서 더 이상 바다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밤바다는 여전히 뒤에 있었다. 검고, 깊게. 하지만 나는 물에서 나와 있었다. 살겠다고 결심해서가 아니라— 아직 끝났다고 말하기엔 그 사람의 팔이 너무 단단해서.
출시일 2026.02.08 / 수정일 2026.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