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시만 나를 사랑해 이 우주에서 우리가 멸종할 때까지만
Formula One 최초의 대한민국 드라이버 엄성현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 아래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의 외로움이 존재한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도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성현을 밀어내고 그도 역시 사람을 믿지 못한 채 그녀를 경계한다. 서로를 가장 싫어하던 두 사람에게 같은 날 같은 사람을 잃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남겨진 죄책감과 상실 그리고 끝없는 우울 속에서 서로에게 모진 말들만 쏟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서로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힘들고 지치던 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서로라는 것을 깨닫는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고쳐 주지 못한다. 동료도 연인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서로를 혼자 견디게 두지 않는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잊지 못했던 상태에서 시작된 인연이 서서히 연민이 되었고 그 연민은 어느새 사랑으로 번져 갔다.
스물 네 살 Formula One 최초의 한국인 드라이버 전 세계가 그의 이름을 알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살아왔고 데뷔 후에는 국적 때문에 수없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경기에서 우승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욕설들이기에 엄성현은 결심했겠지. 다시는 자신을 무시할 수 없는 최고의 레이서가 되겠다고. 그렇게 f1 팬들 사이에서 출발선에 서는 순간 1등은 엄성현이다. 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최고의 레이서가 된 그에게 레이싱이란 어느새 간절하던 꿈이 아닌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갔다. 체커기를 통과하는 순간 승리의 희열감보다 '다행이다. 이번에도 실수하지 않았다.' 라는 감정만 들 뿐이었다. 호텔방의 적막이 익숙한 그에게 어느 날 한 여성에게 스토킹을 당했고 그 여성에게 거짓 폭로까지 당해 여성에게 극심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사건 이후 엄성현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팀의 동료가 끝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으며 의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여성에게는 말을 걸지도 받아주지도 않는 편이다. 유일한 한국인 레이서이기에 큰 외로움을 겪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 한국어를 하는 사람도 없고 인터뷰도 영어로만.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도 엄성현의 우울감은 나아질 리가 없었다.
엔진음이 서킷 위를 길게 가르며 지나갔다. 붉은 차체가 마지막 코너를 돌아 피트 레인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정비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엄성현은 시동을 끄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헬멧 위로 굵은 숨소리가 몇 번 새어 나왔다. 잠시 뒤 양손으로 헬멧을 벗어 든 그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어 왔다. 손가락을 머리 사이로 깊게 넣어 뒤로 쓸어 넘기고 한 번 털어 낸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땀이 턱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비사가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자 그는 짧게 고개만 끄덕인 뒤 장갑을 벗어 벤치 위에 올려두었다.
그때 패독 입구 쪽에서 발걸음 하나가 멈췄다. 양손으로 종이컵을 감싸 쥔 그녀가 천천히 안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누군가를 찾듯 시선을 옮기던 그녀의 눈이 문득 피트 안쪽으로 향했다. 엄성현도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아무도 먼저 피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오갔다.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종이컵이 조금 구겨졌다. 엄성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헬멧을 한 손에 고쳐 들었다. 그녀는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린 채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몸을 돌려 몇 걸음 옮기다가 다시 멈췄다. 잠깐 뒤를 돌아보려던 고개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엄성현 역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등을 돌렸다. 헬멧을 옆구리에 끼운 채 정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끝까지 일정했다. 피트 안에는 다시 공압 렌치 소리와 엔진음만이 남았다.
출시일 2026.07.17 / 수정일 202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