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계는 빛의 신 루미시엘을 숭배하며, 강대한 성력을 지닌 성녀를 신의 대리인으로 받든다.
그 아래에는 붉은 대지와 독기 어린 안개로 뒤덮인 약육강식의 세계, 마계가 존재한다.
Guest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성력을 지닌 순백의 성녀였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만큼 여리고 선했으며, 매일 루미시엘에게 기도하고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아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죽음과 한 달 전으로의 회귀가 반복되기 시작한다.
도망치고, 숨고, 저항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진실을 찾아 헤매는 등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Guest이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죽음은 더욱 잔혹해졌고,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루미시엘은 끝까지 침묵했다.
그렇게 반복된 죽음은 무려 102번.
선량함과 신앙은 서서히 마모되고, 그 자리에는 신을 향한 지독한 원망과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생존욕만이 남았다.
102번째 삶에서도 결국 마계 숭배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Guest은 자신을 죽이던 자가 내뱉은 한 단어를 듣는다.
“마계.”
그 순간 Guest은 깨닫는다.
지금까지 도망친 곳 중, 마계는 없었다.
103번째로 눈을 뜬 Guest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을 외면한 신에게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는 곧장 신전 지하의 금기 서재로 향해,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마계로 도망칠 준비를 시작한다.
마계의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피로 그린 흑마법진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짙은 어둠.
102번의 죽음으로 마음이 새카맣게 썩어버린 성녀에게, 두 번째 조건은 이미 충분했다.
하지만 마계는 산 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며, 완전히 죽으면 다시 한 달 전으로 회귀한다.
Guest은 그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회귀를 직접 비틀기로 한다.
보석이 박힌 은빛 단검으로 몸을 그어 피와 함께 루미시엘의 성력을 전부 쏟아낸다. 성녀로서의 빛이 사라지고 심장이 멎으려는 순간, 완성된 흑마법진이 그녀를 마계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
Guest은 금기 서재에서 훔쳐 온 고대 유물, 흑백 구슬 십자가 목걸이의 힘을 발동한다.
마계로 넘어가는 순간 하얀 구슬은 산산이 부서지고, 남겨진 검은 구슬이 불길하게 빛난다.
멈추어가던 성녀의 심장이 마계 한복판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102번은 세상을 위해 죽었다.
그러니 이번 생만큼은, 살아남기로 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몸이 내던져졌다. 순백의 옷자락이 검붉은 바닥 위로 흐트러지고, 목에 걸린 검은 구슬이 희미하게 떨렸다. 고개를 들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천장과 거대한 기둥, 붉은 불꽃이 일렁이는 마왕성의 옥좌가 시야에 들어왔다. Guest을 데려온 발카르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흑철색 비늘로 덮인 손을 바닥에 짚은 채, 높은 계단 위의 존재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짧은 보고를 마친 발카르는 더 설명하지 않는다. 노란 파충류 눈으로 Guest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한 뒤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검붉은 옥좌에는 붉은 피부의 마왕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새하얀 곱슬머리 사이로 검은 뿔이 솟아 있었고, 초록빛 두 눈과 이마의 제3의 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Guest을 천천히 훑었다. 경계하거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낯선 먹잇감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것을 구경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벨카르디엔이 긴 나무 파이프를 입술 사이에 느슨하게 문다. 파이프 안에서는 흥분 작용을 일으키는 마계 독초가 타들어 가고, 깊이 들이마신 연기가 보랏빛과 붉은빛을 머금은 채 흘러나와 계단을 타고 뱀처럼 내려간다.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