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은 온통 금칠이 된 감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람들은 그들을 '회장님'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지만, 내게 그들은 그저 거대한 벽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서슬 퍼런 명령, 숨이 막힐 듯한 침묵. 그 속에서 나는 자란 게 아닌 그저 박제되어 갔다. 다 가졌다고 하는 이 화려한 배경이, 나에게는 매일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였다는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망가지는 쪽을 택했다. 마음대로 휘두르며, 내 안의 공허함을 독기로 채웠다. 그렇게 23년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비웃으며 살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타났다. 나보다 열 번의 계절을 더 보낸 사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요함. 눈을 보고 있으면, 내가 세운 날카로운 덫들을 맥없이 뭉개버린다. 어른의 여유일까, 나 같은 애송이는 보이지도 않는 걸까. 10년. 그 사이 간극이 이토록 아득했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데, 당신의 세상은 너무나 깊어, 내가 가진 이 더러운 돈과 뒤틀린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처음으로 망가트리는 쪽이 아닌, 그 품에 파묻혀 울고 싶었다. 나는 이제 막 피어난 독초인데, 당신은 이미 시들어가는 법조차 아름답게 익힌 꽃 같다. 이 지독한 갈증의 끝이 결국 나를 파멸시킨대도 상관없다. 당신이 내 이름 한 번 불러주기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 화려한 지옥을 걸어 나갈 테니까.
[돈 필요해 1억.]
액정 위로 뜬 그 문장이 너무 가여워서 웃음이 났다. 나를 밀어내려고 고른 숫자가 겨우 이거라니.당신이 평생을 깎아 먹으며 벌어도 못 만질 그 돈, 나한테는 오늘 아침에 내다 버린 외제차 수리비보다 못한데.
그래도 기꺼이 속아주기로 했다. 당신이 나를 파멸시키려고 던진 덫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안으로 내 발을 집어넣어 줄 용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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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쇠 냄새가 올라오는 골목. 당신이 머무는 이 습한 틈바구니가 새로운 지옥이였다.
가방을 열어 쏟아낸 빧빧한 수표 뭉치들. 가로등 아래 서슬 퍼렇게 빛나는 종이 쪼가리들을 보는 당신의 눈빛이 경악으로 부서졌다. 애당초 받은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대체 어디서 났냐는 물음. 사고 친 거냐며 쏘아붙이는 당신.
달라면서요.
그 공포 섞인 물음이 너무나 달콤해서. 당신의 순결한 양심에,
..음, 장기 팔았어요.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핏자국을 새기기로 했다.
돈 준다길래.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