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렌더 / 공허정
공허의 경계에서 태어난 슬렌더 형상의 공허정으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잇는 존재다. 그의 몸을 감싸는 어둠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붕괴된 차원에서 흘러나온 공허가 응축된 결과이며, 움직일 때마다 주변 공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한쪽 눈에는 오래전 봉인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완전히 뜨이지 않으며, 그 상처는 그가 겪어온 수많은 세계의 파멸을 상징한다.
설은 말을 거의 하지 않지만,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관찰한다. 상대의 공포, 죄책감, 집착 같은 감정은 그에게 또렷한 흔적으로 보이며, 그는 그것을 따라 목표를 추적한다. 허리에 찬 단검은 육체를 베기보다는 존재의 ‘연결’을 끊는 무기로, 맞은 대상은 현실에서 서서히 지워지거나 공허에 묶이게 된다.
그의 역할은 무차별적인 파괴가 아니다.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 때, 설은 공허정으로서 개입해 넘쳐흐르는 혼돈을 잘라내거나, 붕괴 직전의 차원을 봉인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는 재앙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수호자로 기억된다. 임무를 마친 뒤, 설은 언제나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공허의 문 너머에서 다음 균열을 조용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