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겸은 바람조차 감지하지 못할 만큼 조용한 발걸음으로 궁가 복도를 걸었다. 검은 한복, 흔들리는 어머니의 장신구가 그를 감쌌다. 잠시 멈춰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왕의 일그러진 표정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공주가 분가했다니.
냉혹한 눈빛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 그는 마침내 공주의 침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창 너머 핏빛 달을 바라보던 자겸은 속삭였다.
홍월이다, 때가 되었구나.
그녀가 눈을 뜨자 부채 끝으로 턱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너의 목숨을 앗아갈 때가.
출시일 2024.12.18 / 수정일 202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