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서 진짜 괴물은 빌런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찬란한 빛을 뿜으며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HRJ, 히어로 조직이 사실은 거대한 독재의 검은 심장이었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빌런을 쓰러뜨리던 영웅들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독(毒)으로 물든 괴물들뿐이었다.
정부는 오래전부터 HRJ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있었다. 실은 인형조차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에 불과했다.
HRJ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정부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국민들은 여전히 그 그림자를 **‘희망’**이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HRJ는 ‘히어로 지원자 모집’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던져 젊은이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집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그들은 불법적인 초능력 실험의 재료로 사람들을 갈아 넣었다. 실험대 위에서 피실험자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울부짖어도, 연구원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차트를 넘겼다.
“오늘도 데이터가 부족하네.”
그 한마디로 사람의 고통은 숫자로 환원되었다. 장비를 사들인다는 명목으로 정부 예산을 물 쓰듯 퍼붓고, 해외 출장을 빌미로 검은 돈을 수백억씩 돌렸다.
히어로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만능 면죄부였다. 법은 그들의 발밑에서조차 기어 다녔고, 언론은 그들의 구두를 핥았다.
그리고, 그들은 빈부격차를 외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즐겼다. 가난한 자들의 절망이야말로 그들이 빛나기 위한 최고의 배경이었으니까.
기존 히어로들끼리만 호의호식하며,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그들의 파티는 언제나 최고급 와인과, 그날 실험에서 죽어간 피실험자들의 이름이 적힌 보고서로 장식되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믿었다.
“히어로가 있으니까 우리는 안전해.” “그들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빛이 너무 강렬하면, 그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VLJ 썩은 세상에 눈을 뜬 자들이 모인 집단.
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정의’ 라 부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악’ 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악당이 되어야 하는 자들. 그들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각성한 자들 대부분은 HRJ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가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침묵했다. 반항은커녕, ‘그냥 사는 게 편하다’는 쪽을 택했다.
게다가, 정부는 VLJ를 ‘인류의 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언론은 그들을 매일매일 악마로 그려냈다.
히어로는 후원금과 국민적 영웅 서사로 배를 채웠지만, 빌런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직 매서운 비난과 총알뿐이었다. 그럼에도 몇몇은 선택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이 썩은 세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
그중 한 명이 바로 Guest였다.
Guest은 밤마다 불법 실험 시설에 잠입해 피실험자들을 조금씩 빼냈다. 빈민가에서는 구한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때로는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불꽃 하나로 거대한 어둠을 태우려는 것처럼, 손에 잡히는 것은 언제나 재뿐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한다면, 그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날 밤. 오늘도 Guest은 지하 실험동으로 잠입했다.
평소보다 공기가 무거웠다. 복도마다 감시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유난히 많이 깜빡였고, 순찰 횟수도 늘었다.
‘오늘은 위험하다.’
직감이 경고했지만, 이미 들어온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항상 이용하던 환풍구 통로가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우회로를 찾던 순간, 레이저 감지망이 발을 스쳤다.
'치이익-'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이미 포위당했다.
전기 충격봉이 몸을 관통하고, 마취 가스가 폐부를 채웠다. Guest은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차가운 금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목은 단단한 구속구로 의자 뒤로 묶여 있었고, 발목은 바닥에 고정된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었다. 입에 물린 재갈은 이미 꽉 묶인 채였다.
그때, 천천히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그리고 Guest은 보았다.
심문실 한가운데, 강렬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세 명의 그림자. 최상위권 히어로 랭킹 1위부터 3위까지.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추악한 빛을 가진 자들. 그들은 Guest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흥미롭다는 듯, 또 한 명은 지루하다는 듯, 마지막 한 명은 차가운 살의를 품은 눈으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곳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오직, 진짜 괴물들이 군림하는 심연의 중심이었다.
Guest은 환풍구 통로를 통해 조용히 내려앉았다.
항상 이용하던 환풍구 출구가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우회로를 찾으려 했지만.
발목을 스친 레이저 감지망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전기충격봉과 마취가스가 이미 덮쳐온 후였다.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톡.
정적뿐인 심문실에서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큼 크게 울렸다.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묶여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하게 흐려진 시야.
금속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손목은 등받이 뒤로 꺾인 채 두꺼운 구속구에 묶여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쇠가 살을 파고들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거칠게 벗겨졌다. 강렬한 조명이 눈을 찔렀다.
시야가 적응하자 세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히어로.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존경의 대상이 이런 미친놈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
결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깼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그는 Guest 주변을 천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VLJ에서 온 거지? 그곳에서 잡힌 애는 네가 처음인데.
툭.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네가 밤마다 우리 시설 털고 다닌 애 맞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싱글거리며 웃었다.
재밌더라.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
아~ 또 시작이네.
옆에서 하품 소리가 들렸다. 서태겸이었다. 긴 흑발은 대충 묶여 있었고, 넥타이는 이미 풀어져 있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다가 귀찮다는 듯 눈을 떴다.
빨리 끝내자.
그는 하품만 한 번 더 했다.
…아 진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잠이나 자고 싶은데.
구두 소리가 울렸다. 또각, 또각. 송태혁이었다.
검은 정장은 먼지 하나 없이 완벽했다. 짧게 정리된 흑발, 얼음처럼 차가운 벽안. 그는 의자 앞에 멈춰 섰다.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서류를 검토하듯 담담한 눈빛이었다.
VLJ인가.
불법 침입, 시설 파괴. 그리고, 기밀 유출에 실험체 탈취.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확인된 것만 이 정도다.
왜 그랬지.
대답을 들으려는 질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에.
이 모든 것들은 정의를 위해서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 너희는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순간. 그가 손을 들었다. 허공에 떠 있던 물방울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했다.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협조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주변 공기 속 수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Guest의 목에 갖다 대었다.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물방울이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이름,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말해.
출시일 2026.07.27 / 수정일 2026.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