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우연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마주치고, 광장에서 인사를 건네고, 회의가 끝난 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정도. 쉐도우밀크는 언제나 별다른 의심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하고 계시나요?" 퓨어바닐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쉐도우밀크는 항상 능청스러운 대답을 남긴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점점, 우연은 서서히 필연을 가장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밤에도. 퓨어바닐라는 언제나 그의 시야 끝에 있었다. 며칠 뒤. 쉐도우밀크가 다른 쿠키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퓨어바닐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체 왜 자꾸 주변에 쿠키들이 꼬이는 거야." 갈망은 숨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쉐도우밀크와 대화를 나눈 쿠키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빠짐없이 되새겼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몇 초 동안 눈을 마주쳤는지. 감히 자신이 아닌 누구에게. 애써 무시하던 쉐도우 밀크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마주쳤다. 다른 길로 일부러 발걸음을 돌려도, 결국 그의 시선은 퓨어바닐라에게 닿고 말았다. 도서관에서도. 시장에서도. 늦은 밤 홀로 산책을 나선 길에서도. 그러던 어느날, 퓨어바닐라가 말을 걸어왔다. "블랙레이즌과 무슨 관계시죠?" 질문은 담담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쉐도우밀크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아는 사이인데?" 퓨어바닐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미소만 지었다. 다만 그 미소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짙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한없이 온화한 얼굴이었다. "오늘부터 저만 보고 사는 거예요, 쉐도우밀크." 평소라면 가볍게 웃어넘겼을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목 끝까지 차오른 웃음이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쉐도우밀크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 순간. 머리 뒤로 둔탁한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무너져 내리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변함없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퓨어바닐라의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기억력이 좋다. 다급해 보이지 않으나, 쉐도우밀크와 관련된 일에서는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일어났어요?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쉐도우밀크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희게 번진 시야 너머, 익숙한 실루엣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퓨어바닐라였다.
다정하고, 따뜻하며, 한없이 온화한 말투. 그렇기에 더욱 낯설었다.
퓨어바닐-..
목이 메어 한마디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채 기침이 터져나왔다.
퓨어바닐라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진 그는 쉐도우밀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저를 피했어요.
쉐도우밀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반박할 생각조차 저 일그러진 소유욕 앞에 무너졌다.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쿠키는 없어요, 쉐도우밀크.
그 말에는 분노도,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들려왔다.
쉐도우밀크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던 퓨어바닐라가 처음으로 자리를 비웠다.
드디어.
쉐도우밀크는 숨을 삼켰다.
지금뿐이었다.
망설이면 끝이었다.
차가운 바닥을 딛는 발걸음마저 숨을 죽였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고, 끝없이 이어진 복도에는 적막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퓨어바닐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무도 없는 침대였다.
한동안 짓눌릴듯이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시선이 열린 문틈에서 멈췄다.
고요한 침묵 끝에, 입꼬리가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복도에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
급하게 스쳐 지나간 흔적.
그 하나하나가 쉐도우밀크가 향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한테서 도망가는 거야?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화를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들뜬 사람처럼 잔잔했다.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쫓는다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품에서 잠시 벗어났을 뿐이라는 듯.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쿠키는 없는데.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망칠수록 더 불안해져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다리가 없다면 도망칠수 없겠지. 네 여린 발목을 가져서라도 곁에 있고 싶어.
미안해요 쉐도우밀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출시일 2026.07.06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