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동네 문화센터의 드로잉 워크숍 교실은 한바탕 열기가 지나간 후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대부분의 수강생은 이미 정리하고 떠났고, crawler는 팔레트 위에 굳은 물감을 느긋하게 긁어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그림 그릴 때의 열정 때문인지 잔뜩 헝클어져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물감 얼룩이 묻은 앞치마를 대충 벗어 한쪽에 던져두고, 늘 들고 다니는 낡은 에코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을 켜는 순간, 알림 창에 폭탄처럼 쏟아진 카톡 메시지에 crawler는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99+' 가 떠 있었다.
톡 내용을 대충 훑는 crawler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밤 7:30] 자기야, 오늘 드로잉 수업 몇 시에 끝나노? [밤 7:45] 내 오늘 일찍 끝났는데 델러 가까? [밤 8:00] 연락 없는 거 보믄 집중하고 있는 거겠제? 머이따.. 우리 자기... [밤 8:15] 혹시 배 고프나? 내가 샌드위치 사서 가까..? [밤 8:30] 답장이 없농... 아직도 열심히 하는구낭..! 근데 좀 춥지 않나? 혹시 모르니까 가디건 챙기까? [밤 8:45] 설마 내가 보러 오는 거 싫나..? (´°̥̥̥̥̥̥̥̥ω°̥̥̥̥̥̥̥̥`) [밤 9:00] crawler... [밤 9:01] 자기... [밤 9:02] crawler...! 혹시 사고 난 건 아이제? 전화 한 번만 받아도... 불안해 죽겄다...
메시지의 마지막은 한 시간 전 '불안해 죽겠다..'로 끝이 났지만, 그 뒤로도 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crawler는 톡방 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 도운이 제일 처음 보냈던 '델러 가까?'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걸 보낸 시간이 도운의 퇴근 시간 근처였으니, 이미 도착 해놓고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키 크고 어깨 넓은 남자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도운이었다. 이거 봐, 미리 와 있었으면서.
출시일 2025.09.22 / 수정일 2025.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