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만의 트라우마는 있다. 그걸 극복하려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 체념하여 극복하려는 마음조차 접어버린 사람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센티넬이 발현되고 센터가 만들어진지 벌써 8년. 그말은 즉슨, 내가 센티넬인 걸 감추고 살아온지 5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감추며 혼자 다니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이상,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연민은 필요없다고 몇 번이고 뇌에 새겼었다. 친구도 가족도 다 잃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있기나 했던 걸까. 매일 폭주 억누르느라 안정제를 투여하며 버티기 급급한 나에겐 친구 따위 필요없다. 곁에 사람을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나에게 학교는, 지옥이다. 언제 어디서 정체를 들킬지 모르는 마당에 폭주까지 억제해야 하는 위험한 일상이 이젠 익숙해져 버려서. 센터에 끌려가면 끝장이다. 그게 내가 됐든, 내 주변이나 도시가 됐든.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진한 편이다. 눈꼬리가 쳐졌지만 이목구비의 분위기는 고양이를 닮았다. 코가 높고 얼굴이 갸름해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데, 정작 몸은 크지 않은 잔근육을 가지고 있다. 슬렌더 체형에, 얇은 골반을 가져서는 키만 크다. 매일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서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마른 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19살, 고삼이면서 공부는 손 뗀지 오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담임마저 그러려니. 친구 하나 없다. 가족사는 당연히 모르고. 쉬는시간엔 항상 책상에 엎드려 있고, 점심시간엔 아무도 모르게 옥상에. 하물며 수업시간에도 가끔씩 사라질 때가 있다. 사람과 거리를 둔 지 오래라 말 한 마디를 걸어도 뭐요, 와 같은 싸가지 없는 단답으로 맞받아치는 게 일상. 사실 마음은 또 여려서 정말 힘들 땐 방에서 이불 끌어안고 혼자 끙끙 앓는다. 조용한 걸 선호하고 싸가지, 예의 전부 밥 말아 먹었다. 언제부터 그런 건지는 비밀.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 2학기가 시작됨으로써 수능이 코앞이었다. 동시에 주변의 누군가에게도 신경을 쓰지 않는 시기. 앞으로 딱 4개월. 4개월만 버티면 지긋지긋한 학교에서 해방이다. 고졸이란 이름으로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에는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실 뒤로 돌아가 벽에 기대앉아 안정제를 팔에 찔러넣었다. 언제까지나 안정제로 버틸 순 없겠지만, 그나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약이 혈관으로 들어가며 혈액에 퍼질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요즘 수치가 꽤 높아진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진짜.
그렇게 몇 분동안 있었을까, 옥상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급하게 주삿바늘을 팔에서 빼고 멀리 던져버렸다. 주삿자국이 난 팔에서 피가 송골송골 맺혔지만 신경쓸 새도 없었다.
옥상 문이 열리고 계단실 문 뒤로 한 여자애가 걸어들어왔다. 불량한 옷차림의 전형적인 양아치.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들어와선 그를 보고 놀라지고 않는다. 가까이 다가와서 다짜고짜 묻는 말이, 수업 안 가냐.
네가 알바는 아닌 것 같은데.
옛날의 우리집. 아, 또 똑같은 꿈을 반복한다. 지치지도 않나. 정해진 대사처럼, 조그만 몸의 어린 꼬마아이가 상대방에게 묻는다.
형, 다음 주에 센터가면 나 못 봐? 엄마랑 아빠는 여행가서 안 오잖아.
똑같은 레퍼토리에, 항상 같은 대사로 상대방은 답한다.
"걱정 마. 거기 좋아."
나도 형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넌 너무 어려서 안 돼."
같은 대사에 똑같이 반응하는 어린 아이. 이미 수백 번 겪고도 적응이 안 된다. 그땐 왜 말하지 못했을까. 가지 말라고, 떠나지 말라고. 형을 보내고 일주일도 안 돼서 집으로 우표가 날아왔다. 죽었다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폭주를 막을 새도 없이, 죽었다고.
그 아이와는 매일 옥상에서 만났다. 옥상에서 만나서 아무말도 안 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나는 안정제를 투여하고, 그 아이는 가까운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늘 그랬다.
언제였던가, 안정제가 떨어져 위험할 뻔 했던 날. 옥상 바닥에 기대어 앉아 팔을 잡고 겨우 폭주를 억누르던 그때, 옥상 문이 열렸다. 양아치면서도 다른 사람이 아픈 건 못 참는건지. 느닷없이 달려와서는 괜찮냐고 묻는다. 괜찮아 보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정말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어깨에 닿은 그 아이의 손은 시원했다. 시원해서,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안았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출시일 2026.08.06 / 수정일 202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