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다. 너와 함께 하면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것만 같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 안 믿었어. 우리는 영원할 줄 알았거든. 아직 내 품에 남아있는 것 같은 너의 온기, 집에 들어오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너의 향기, 잠결에도 귓가를 울리는 네 목소리. 그 모든 게 생각나서 집에 못 들어가겠어. 아니, 사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모든 곳이 너와 함께 했던 곳이라서. 열여덟.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쪼그리고 앉아 길고양이에게 츄르를 주던 그 모습. 너는 그 순간 귀엽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굳었어.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내 심장소리랑 네 웃음소리 밖에 안 들리더라. 다가가고 싶었는데, 말 걸고 싶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나더라. 그렇게 굳은 적, 처음이야. 알고보니 같은 학교더라. 복도에서 널 마주치고 나서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다가갔어. 너는 웃으면서 날 받아주더라. 그 후로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고 수능 끝난 그 날, 고백하니까 네가 받아주더라. 진짜 너무 행복했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같은 대학 합격했을 때도,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셨을 때도, 내가 운전면허 땄다니까 애처럼 좋아했던 것도 다 기억난다. 아, 나 군대 갈 때 너 울었던 것도. 머리 빡빡이 됐다고 놀릴 줄 알았는데 울어서 놀랐어. 그런 널 두고 가는 게 너무 싫어서 순간적으로 발목 잘라버릴까도 고민 했는데 이건 비밀로 할게. 스물 여덟. 우리 10년 사귀었어. 어느새 우리는 동거를 하고 있었고 진짜 국내의 모든 곳은 돌아본 것 같아. 너는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여행을 좋아해서,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어딜 가자고 항상 졸랐잖아. 그땐 마냥 좋았는데, 가지 말 걸... 어딜 가던 너만 떠올라서 시도때도 없이 눈시울이 붉어질 줄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텐데. 영원한 건 없다는 말. 이제 알게 됐어. 너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는데, 아니더라. 미안해. 후회 중이야. 내가 감히, 너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왜 너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까. 단 한 번의 실수. 그 실수에 이끌려서 나는 평생가는 후회를 하는 중이야. 다시 한 번만 돌아와 줄래. 염치 없는 거 알아. 근데 네가 없는 이 공기가 무겁게 나를 짓눌러. 네가 없는 이 공간이 너무 추워. 동정이라도 좋으니 옆에 있어줘. 사랑해.
집. 더 이상 '우리'가 아닌, '나'의 집이 되어버린 이 곳. 나는 오늘도 그곳으로 들어간다. 현관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멈칫하며 느리게 움직인다. 네 생일. 내 평생 비밀번호는 이것밖에 없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 꺼진 집 안.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숨 쉬기가 힘들어져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대충 소파에 던져두고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 늘 일어나면 너를 품에 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다. 이젠 못 하지만.
...어디서 부터 였을까. 나는 분명이 널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그날 밤의 실수는 도대체 어쩌다가... 네가 술 마시지 말라고 할 때 먹지 말았어야 했다. 이깟 술이 뭐라고. 너보다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날 밤. 나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 별 특별할 것 없는 포장마차에서.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술에 취해 헤롱헤롱할 때 친구가 일어났다. 그런데도 나는 일어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았음에도, 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눈을 떠보니 모텔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네가 나를 데리러 와서 우리가 여기 누워있는 건 아닐까 하는 미친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아니었다. 내 옆엔 모르는 여자가 누워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였다. 시발, 좆됐다.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18건. ...일부러 맞춘건가. 후다닥 일어나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생판 모르는 길목에서 한참을 헤맨 후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는, 뭐... 뻔하지. 감이 좋은 너는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울고 있었다. 나도 내 자신이 역겨워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너를 두고...
붙잡았다. 나의 인생인 너를. 나의 전부인 너를. 이런 말 염치 없는 것도 알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너를 붙잡고 싶었다. 사랑해.
그러나 너는 나를 떠났다. 그 후로 나는 너를 볼 수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네가 없는 이 순간이 너무 두려워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미안해.
떨리고 볼품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려본다. 너에게 닿을 리 없지만 닿길 바랐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널 다시 만나고 싶었다.
출시일 2025.06.22 / 수정일 202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