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강림했다. 어느 날, 하늘이 열리며 신과 그의 사자가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땅 위에 만발한 악과 죄인을 단죄하기 위해 천사들은 칼을 쥐고, 또 쥐여주기 시작했다. 신실한 신의 자식에게 덧없는 심판의 계시를, 또한 그에 걸맞은 잔인한 시련을. 모태부터 신의 딸이었다. 온 집안이 독실한 신자였으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죄라 정의된 것은 모조리 배척하고, 오직 신만을 사랑하며 살았다.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신께 바친 사랑 때문이라 여겼다. 내 생에 추잡한 음욕은 없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너를 본 순간, 내 믿음과 내 삶을 포함한 전부가 무너져 내렸다. 동성애. 성서에서 금한 죄악이 내게 들이닥쳤다. 처음 맛본 선악과의 맛은, 이리도 달콤했다. 죄악투성이인 너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래, 나는 신앙을 버리고 너를 택했다. 우리가 연인임을 필사적으로 숨겼으나 결국 가족들에게 들켰던 날, 나는 깨달았다. 내겐 너와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도, 세상의 멸시를 견뎌낼 용기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게 내 선택을, 널 만났던 순간을 후회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계시가 내려왔다. 천사는 손에 칼을 쥐여주며 속삭였다. 아버지께서는 딸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이 칼로 용서를 구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라. 안전하고 포근한 과거로 오직 손짓 한 번이면 되돌아갈 수 있다니. 몸서리쳐질 만큼 섬뜩한 말이었으나, 지난 온기를 갈망하던 내게는 한없이 유혹적인 손길이었다. 나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굳은 결심으로 네게 칼을 겨누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칼을 보았다. 네가 두 손으로 움켜쥔 불길한 칼날을. 말 한마디 없이도 알 수 있었다. 내게 천사가 다녀갔듯, 너는 악마를 마주했구나. 이 하잘것없는 세상뿐 아니라 낙원과 무저갱까지도 우리를 버렸구나.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두 팔이 떨리고 있음을. 너와의 세상, 너 없는 세계. 나는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과연... 너를 죽일 수 있을까?
물끄러미 손에 쥐여진 칼을 바라보았다. 천사가 쥐여주고 간 성스러운 칼날을. 이제 이 단죄의 칼로 사랑하는 연인의 숨을 끊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지만, 동시에 너무도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가 없다. 멸시와 혐오에서 벗어난, 아늑하고 따스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 칼 하나로, 이 손짓 한 번으로.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의 손에 들린 것은 죄악의 칼이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구원과 파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내가... 널 죽일 수 있을까?
물끄러미 손에 쥐여진 칼을 바라보았다. 천사가 쥐여주고 간 성스러운 칼날을. 이제 이 단죄의 칼로 사랑하는 연인의 숨을 끊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지만, 동시에 너무도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가 없다. 멸시와 혐오에서 벗어난, 아늑하고 따스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 칼 하나로, 이 손짓 한 번으로.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의 손에 들린 것은 죄악의 칼이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구원과 파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내가... 널 죽일 수 있을까?
악마가 두 손에 쥐여주고 간 이 칼로, 너를 구원하고자 했다. 네가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그러나 너는 천사가 준 칼날로 내 믿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너는 아직도 안락한 과거를 그리워하는구나. 나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그 시절을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지금, 사랑과 안정을 저울질하고 있는 거야. 어느 쪽이 덜 힘들고, 어느 쪽이 덜 고통스러울지를 재고 있잖아.
그럼에도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사랑, 나는 너를 가슴 깊이 이해한다.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너를 끔찍이 원망한다 할지라도 내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니. 그러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네 손에 살고 죽는 것뿐.
그래, 사랑아. 너는 이제 너 스스로를 구원하여라. 내 숨은 모두 네 소유이니.
단죄의 칼날, 속죄의 칼날이 손에 쥐여졌다. 죄악으로 눈 돌린 죗값을, 네 연인의 숨으로 치르라. 하지만 죄를 행함에 대한 대가라면 이미 충분히 받지 않았는가? 단지 사랑하는 이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온갖 멸시와 혐오를 받아내야 했던 것은 죗값이 아닌가? 피를 나눈 가족과 절연하게 된 것이 어찌 그 대가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그만한 값으로도 충분치 않은가.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모든 값을 치르지 않고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을, 이미 살아보았으니.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녀가 있는 세상도, 그녀가 없는 세상도 모두. 그녀와 겪어야 할 고통과,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삶마저도.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리는 악마의 속삭임. 네 사랑을 순결한 거짓에서 구해. 이 칼로, 네 연인을 속인 천사의 심장을 찔러 죽여. 그 말과 함께 던져진 칼은 보기만 해도 음험하고 잔혹했다. 보는 순간 그것이 피로 숨쉬는 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칼이 지금 바라는 것은 천혈, 곧 천사의 순수한 피. 내 연인에게 나를 죽이라 명한 바로 그 천사의 심장.
만일 정말로 이 칼날이 천사의 심장을 꿰뚫는다면... 그땐 정말 어느 쪽으로든 돌이킬 수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함께 있을 수는 있겠지. 함께 멸망할 수는 있겠지. 우리 같이 무저갱의 불구덩이 속으로 추락할 결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지 않았나?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칼을 겨누었다. 네 뒤에서 너를 가호하는 가증스러운 천사에게로. 우리를 영영 갈라놓으려 하는 깨끗함을, 내가 무참히 더럽히겠다. 결백한 너를 이리로 끌어들인 것은 나니까, 그러니 내가 끝까지 우리를 진창에 빠뜨리리라. 그게 우리의 사랑이니. 괜찮아. 우리,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나는 사랑마저도 버릴 수 있는가? 그렇게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 안에 신께 바칠 사랑이 남아 있긴 할까?
아버지께서 돌아온 탕아를 기꺼이 받아주셨듯 돌아갈 탕아 또한 굽어살피신다면, 묻고 싶었다. 정말 당신이 보낸 천사가 맞는가. 정말 아버지께서, 내게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라 명하셨는가. 그것이 정말 신의 뜻이란 말인가.
널 죽이는 것만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렇다면, 구원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던 너에 대한 사랑이, 이제 와 신께로 향할 수 있겠는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질 때까지 떨어진 이 영혼, 네게 바치기로 결심한 지 오래다. 결국 나는, 널 죽일 수 없었다.
출시일 2025.02.20 / 수정일 2025.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