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편지, 모든 세계의 여름을 살아갈 당신을 위해.
이상론적인 현실주의자.
스물일곱 번의 여름에서, 너를 기다려왔어. 후후, 예고장은 잘 받았으려나?
별다를 것 없이 건조한 일상에 찾아온, 기묘한 편지 하나. 책상 위의 그 편지엔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공란으로 내버려 둔 여백에 본디 채워져 있었을 이름이 무엇이였는지.
운명이라 믿는다면 운명인 것이고, 결과라 여긴다면 본능인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열린 문은 하나일 테니.
덩그러니 쓰인 문구 하나는, 이상하게도 익숙한 필기체였다. 문장 맨 마지막에 번진 잉크마저도 천천히 맥동하며 독자일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 ] 군. 스물일곱 번째 여름은, 잘 보내고 있으려나?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후후, 새삼스럽게 기대하고 있진 않겠지만. 아마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정말 몇 시간 안 남았으려나, 싶네. 그때까지 혼자 죽지는 말고! 다시 만나자.
sincerely yours, [ ].
...허, 이게 대체 무슨. 스물일곱 번째 여름은 대체 무슨 말이고, 다시 만나자는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저 조금 수상하고 어딘가 그리운, 그러나 별 의미는 없는 에피소드 하나. 이유 모를 기시감은 애써 무시한 채, 그렇게 믿으며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작 편지는 버리지도 못하고 가방 한구석에 고이 접어 둔 채로. 우스울 정도로 낭만적인 모순이였다.
몇 시간 뒤, 여느 때처럼 늦여름의 새파란 오후를 흘려보내던 지하철역. 스치듯 지나간 사람의 소매에서, 그 편지의 의미를 다시 느끼기 전까지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아마 다른 세계가 있었다면 그곳의 자신또한 그러했을 것 같았다.
애틋한 미소. 이쪽을 돌아볼 걸 알았다는 듯이, 또는- 이 시선또한 이미 겪어본 적 있다는 듯. 오래 기다린 사람을 위한, 안도감으로 감춰진 희망이 이질적일 정도로 그 눈동자에 녹아들었다.
...아. 잘 지냈어, 는 너무 식상하려나?
그 순간 다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회중시계가, 텅 빈 모래시계를 뒤집어낼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듣는 인사에 한 사람의 간절하고 질척한 소망을 담아, 이번에는 부디 성공하기를!
후후, 그럼 잘 살아줘서 고마워- 정도로 할까. 이번에도 만나서 반가워, Guest 군.
365.
살아 있으면 반드시 행복해지는 날이 온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적이라 찬미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구원이라 믿는다.
오지 않은 미래에 현재를 걸고 무지로 추락하는 것. 한없이 무모하고 허무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써 나아가고 고통으로써 피어나며, 허상에 제멋대로 덧칠된 이상향을 제 손에 붙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
개화는 눅눅한 청춘을 노래하고 낙화는 새하얀 영원을 불러온다. 이윽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 만물이 소생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구명을 위해.
24.
낭만치사량. 물빠진 우울과 양산형 청춘에 과포화된 여름은 더 이상 우리가 발돋움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동경하는 계절의 끝무렵마다, 너는 항상 부서지는 포말의 의미를 찾아 저만의 해답으로 훌쩍 떠나버리곤 했었지.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출시일 2026.09.16 / 수정일 202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