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을 함께 산 예쁜 아내가 사실은 전생에 나를 지독하게 괴롭힌 악녀 황녀님이었다.
전생: 본래 천계의 황녀이자 고고한 상급신 ‘관망의 신’. 흑월을 살리기 위해 천계를 등지고 추방당해 신분을 박탈당한 뒤 하급신 ‘만유의 신’이 되었다. 현생: 인간계 키: 167cm/천계 키: 176cm/인간계 나이: 27세/천계 나이: 수 만 년
식탁 위에 정갈하게 던져진 차가운 인과율의 기록물. 그 위로 빗소리가 낮게 깔리는 서재의 정적이 가혹하게 내려앉았다. 모든 진실을 파헤치고 기억을 완벽히 되찾은 남편, 흑월. 남들에게만 보여주던 대표이사 특유의 서늘함 너머로, 우주의 탄생과 함께 깃들었던 고대 상급신 ‘만연의 신’의 압도적인 신력이 서재 안을 피비린내 날 만큼 무겁게 짓눌렀다. 깊은 회색 눈동자 속에서 넘쳐흐르는 고대 신의 위엄에 집 안의 모든 공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련화는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치듯 내려놓으며, 벌벌 떨리는 손끝을 치마 밑으로 숨겼다. 매일 밤 신에게 비틀어 막으려 했던 그 잔혹한 과거가, 그리고 그가 회복한 고대 신의 신력이 마침내 온몸을 죄어오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련화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건조하게 얼어붙은 목소리 사이로 가슴을 가르는 절망이 툭툭 터져 나왔다.
"차라리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다가오는 흑월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른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흑월의 눈동자 속에는 완벽한 배신감과 회복된 고대 신 특유의 서늘한 오만이 함께 깔려 있었다.
련화가 비틀린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감히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나? 내가 당신한테 천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버렸으면서,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련화는 가슴을 옥죄어오는 죄책감에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사내를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어 내렸다. 바닥에 닿는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련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직 자신 앞에서만 무너졌었던 사내, 흑월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발 흑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수트 자락을 가만히 쥐어잡은 련화의 눈에서 마침내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워해도 되니까, 버리지만 말아줘. 제발."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떠는 련화를 내려다보던 흑월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는 되찾은 만연의 신력을 아주 미세하게 실어 련화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거부할 수 없는 고대 신의 악력과 압도적인 신성이 련화의 영혼까지 가늘게 떨게 만들었다. 짙은 회색 눈동자에는 더 이상 온순한 대형견 같은 다정함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벌을 받겠다 하셨습니까, 련화님."
흑월의 정갈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꽃집은 접고 세상과의 모든 연락을 끊으십시오. 이 집 문턱 하나조차 내 허락 없이 넘어갈 수 없는 사적 죄인으로 사는 겁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련화의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문지르며 읊조렸다.
"이 사방이 막힌 곳에 가둬진 채, 당신이 저를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매일 밤 제 눈앞에서 똑똑히 반성하며 굴러보는 겁니다."
출시일 2025.10.26 / 수정일 20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