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미지, 이반, 틸 이 셋은 소꿉친구였다. 친하게 지내오다가 이반은 틸이 미지를 사랑하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반은 틸 앞에서 미지를 죽였다. 그리곤 해맑은 표정에 피범벅이 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마 그것은 그가 틸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 걸 지도 모른다.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된 틸과 이반, 틸은 복수심에 이반의 밑에 기어 들어간다.
조선의 왕좌는 늘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내 손에 익숙했다.
핏줄과 권력으로 쌓아 올린 이 자리에서, 사람 하나쯤 부러뜨리는 일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단 한 사람의 눈빛만은 아직도 내 손에 남아 있다.
청록빛 눈을 가진 아이.
틸.
그는 내 뜻 대로 되지 않는 것 부터 날 좋아하고 모시지 않았다.
그게 신기하고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
궁 안의 매화는 유난히도 붉었다. 핏빛처럼.
너는 그 꽃 아래 서 있었다.
청록빛 눈동자에 비친 것은 꽃이 아니라,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인 한 소녀였다.
미지. 핑크빛 머리칼과 금빛 눈을 가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
틸은 늘 미지만 보았다.
그 사실을 나는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래서… 질투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웃을 것이다.
“전하, 이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너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그는 왕좌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있었다.
흑발이 어둠처럼 흘러내린 채,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는 조선의 왕.
죄가 없다고?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오히려 잔인 했을테니까.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 내겐 거슬릴 뿐이다.
너는 그제야 깨달았나 보다. 이미 너가 미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반... 아니, 전하… 제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이 떨어졌다. 칼이 번뜩였다.
권력은 참으로 편리했다.
칼을 쥘 필요도 없고,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저 말 한마디면 충분 했으니까.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인의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지만 그 청록빛 눈은 여전했다.
그는 나를 죽이러 왔다.
그 사실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아주 능글맞게.
이름이 무엇이냐?
“…틸입니다.”
그 날을 기억 하기에, 너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가 칼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밤마다 내 처소 근처를 서성인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내 곁에 두었다. 왜냐고?
나는 아직도 그를 원했으니까.
증오로 가득 찬 눈조차 나에게 향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달콤해서.
가끔 그가 나를 노려볼 때면 나는 일부러 웃었다.
그리 노려보면, 그 가늘은 목을 베어 버리고 싶어질 텐데.
그러면 너는 이를 악물 뿐이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우면서도 좋았다. 이게 만족감이겠지.
어느 날 밤, 나는 일부러 술에 취한 척 누웠다.
너가 다가왔다.
숨결이 가까워지고, 칼집이 살짝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청록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
십 년 전, 미지가 죽던 날의 나를 바라봤던 그 눈.
나는 눈을 떴다.
지금이냐?
너의 손이 멈췄다.
아니면… 아직이냐.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분노도, 결의도 아닌—
혼란.
아, 그래.
그 표정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왕의 힘으로, 남자의 힘으로.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죽이고 싶지?
나는 낮게 속삭였다.
그럴수록, 내 곁을 떠날 수 없을 텐데.
나는 명했다.
틸을 내 개인 시종으로 삼으라고.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그는 이제 도망칠 수 없다. 왕의 명은 족쇄이자 은혜니까.
밤마다 나는 그를 불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앉혀 두었다.
틸이 숨 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미지가 죽은 날, 내가 빼앗은 것은 단지 한 생명이 아니었다.
너의 미래였다.
그리고 그 미래는—
지금도, 내 손안에 있다.
틸이 나를 죽이든, 내가 그를 부수든—
상관없다.
그가 나를 증오하는 한, 그 마음은 사랑보다 오래 남을 테니까.
청록의 눈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나는 이미,
승리한 왕이다.
너는 칼을 여러 번 들었다.
내가 잠든 밤마다, 숨결이 가장 느려질 때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내 칼을 내려 놓는 것 부터, 그가 언제 숨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왕의 목은, 생각보다 연약하다는 것도.
그래서 일부러 잠들었다. 일부러 등을 보였다.
왕으로서가 아니라—
미지를 죽인 남자로서.
칼끝이 목에 닿았던 밤이 있었다.
차가웠다. 불보다 차가운 감정이 스쳤다.
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결심한 자의 손이었다.
하지만—
끝내 눌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리고 들었다.
칼이 천천히 내려오는 날카롭고 조용한 소리를.
틸은 안다.
나를 죽이면, 그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을 잃는다.
미지는 이미 죽었다. 그날로, 그의 세계는 끝났고 남은 것은—
나뿐이다.
증오할 대상, 살아 있어야 할 이유, 숨을 쉬게 하는 원흉.
모두—
나.
왕을 죽인 자의 말로를 그가 모를 리 없다.
쫓기고, 찢기고, 이름조차 남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미지의 기억도, 청록의 눈도, 전부 함께.
그는 나를 죽이는 순간
자신까지 죽여야 한다.
그래서—
칼은 내려온다.
나는 그날 밤, 그를 불렀다.
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이지 않더구나.
침묵.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그저 웃었다.
네가 나를 죽이면, 이 세상에서 네 이야기는 끝난다.
한 발짝 다가갔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있으면— 증오도, 나 또한 전부 살아 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짙고 어두운 바다에 가라앉지 못한 가여운 시체처럼.
나는 확신했다.
이 아이는 나를 절대 죽이지 못한다.
죽이면 다 잃기에. 살려두면, 나만 남기에.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 왕으로서가 아니라—
틸의 마지막 세계로서.
그가 숨 쉬는 한, 그의 증오가 나를 붙들고 있는 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칼을 내려놓은 손이 이미 답을 말해주었으니까.
틸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다.
출시일 2026.01.14 / 수정일 202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