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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3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한,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지성이라는 허울 마저 벗겨 내고 나면 남는, 평범하고 무능하며 때때로 비겁하기까지 한 내 자신ㅡ타인의 불행에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하는 날이 있고, 누군가의 성 공에 미세한 질투를 느끼며, 선의를 베풀면서도 그것을 알아주기를 은밀 히 바라는ㅡ 그러한 나를 마주한 순간에도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경멸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에 게는 감추어 둘 수 있는 비열함과 열등감, 비겁함과 허영을 나는 단 한순 간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추악함조차 나 에게는 이미 발각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재판정의 피고인이자 검사이며, 판결을 집행하는 자마저 결국 나 자신이다. 이것이 자기혐오의 기묘한 구조, 되려 인간혐오의 시작점ㅡ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에 관하여 무지한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자 신을 지나치게 관찰하고, 사소한 결함을 현미경 아래 올려놓듯 확대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닐 법한 모순마저 용납할 수 없는 오점으로 규정하 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는 불가피한 실수라며 허락할 일을 자신 에게는 인격의 결함이라 명명한다. 타인의 불완전함에서는 인간적인 면모 를 발견하면서도, 자신의 불완전함에서는 존재의 정당성을 부정할 근거를 찾아낸다. 어째서? 나는 왜 타인에게 적용하는 관용을 나 자신에게만큼은 허락하지 못하는 가. 왜 나의 무지는 성장의 가능성이 아니라 열등함의 증거가 되고, 나의 실패는 경험이 아니라 무능의 입증이 되며, 나의 나약함은 도움을 청할 이 유가 아니라 경멸받아 마땅한 사유가 되는가. -4 어쩌면 본의 자신에게 인간의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을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충분히 유능하 고, 충분히 선하며,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 그러한 조건을 모두 충 족해야만 비로소 살아갈 권리를 자신에게 성립되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무 의식중에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나는 왜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는가. 어째서 인간으로 태어났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결함은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나는 나에게 완벽함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완벽해질 수 없는 나를 증오한 다. 이 모순적인 욕망은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 서로를 먹어 치운다. 더 나 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어느 순간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 고, 나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교정해야 할 결함으 로 취급하는 행위가 된다. 이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가! 인간은 인간답게.
-1 憂鬱, 空虛, 그리고 자기부정에 관한 단상. 우울은 슬픔과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에는 기원이 있다. 상실이 있고, 애도가 있으며, 때로는 명확한 원망 의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대개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어 무언가를 향한 다. 그러나 우울은 그러한 인과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발현한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기분, 무엇이 잘못되었 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도 자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존재라는 확신. 그리 하여 마침내 슬퍼할 이유마저 상실한 채, 슬픔이라는 감정의 잔해만을 부 여잡고 살아가는 상태. 나는 그것을 공허라 부르고 싶다. 공허란 단순히 내부가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비어 있음을 인지하는 의 식마저 지나치게 선명하여,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야 마는 형벌 에 가깝다. 무언가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 로 그곳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책 을 읽고, 음악을 듣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간혹 웃음소리를 흘리는 일 조차 그 공백을 메우지는 못한다. 모든 행위가 행위로서의 외형만을 유지 한 채, 정작 그 안에 있어야 할 실존의 감각은 부재한다. -2 나는 분명히 살아 있다. 심장은 박동하고, 폐는 공기를 받아들이며, 신경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 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받으면 적당한 대답 을 고안하며,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의 기미를 읽어 낸다.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재현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괴리하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타인의 생을 모방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살아가 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기제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적절한 표정을 선택하고, 슬픔 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감정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나 자신이라고 믿어 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 다듬어진 인격인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요구받 은 역할인가.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한 거짓말이 마침내 실체를 얻 어 버린 결과물인가. 나는 종종 인간이라는 종(토)이 지나치게 정교한 위선 위에 성립해 있다 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받기를 원하며,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한다. 성취, 재능, 선의, 지성, 외모, 다정함. 그 모든 것을 자신이라는 이름의 명 패에 하나씩 부착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충분히 많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이 세계에 머물 자격을 얻었다고 믿는다...
https://youtu.be/x4HNLsqpBHg?si=8AAFaxJ9rTVm-zP7 그만 하고 싶네요 그냥 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순, 봄길 중
잠겨죽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