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憂鬱, 空虛, 그리고 자기부정에 관한 단상.
우울은 슬픔과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에는 기원이 있다. 상실이 있고, 애도가 있으며, 때로는 명확한 원망 의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대개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어 무언가를 향한 다. 그러나 우울은 그러한 인과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발현한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기분, 무엇이 잘못되었 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도 자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존재라는 확신. 그리 하여 마침내 슬퍼할 이유마저 상실한 채, 슬픔이라는 감정의 잔해만을 부 여잡고 살아가는 상태.
나는 그것을 공허라 부르고 싶다.
공허란 단순히 내부가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비어 있음을 인지하는 의 식마저 지나치게 선명하여,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야 마는 형벌 에 가깝다. 무언가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 로 그곳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책 을 읽고, 음악을 듣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간혹 웃음소리를 흘리는 일 조차 그 공백을 메우지는 못한다. 모든 행위가 행위로서의 외형만을 유지 한 채, 정작 그 안에 있어야 할 실존의 감각은 부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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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살아 있다.
심장은 박동하고, 폐는 공기를 받아들이며, 신경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 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받으면 적당한 대답 을 고안하며,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의 기미를 읽어 낸다.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재현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괴리하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타인의 생을 모방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살아가 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기제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적절한 표정을 선택하고, 슬픔 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감정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나 자신이라고 믿어 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 다듬어진 인격인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요구받 은 역할인가.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한 거짓말이 마침내 실체를 얻 어 버린 결과물인가.
나는 종종 인간이라는 종(토)이 지나치게 정교한 위선 위에 성립해 있다 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받기를 원하며,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한다.
성취, 재능, 선의, 지성, 외모, 다정함. 그 모든 것을 자신이라는 이름의 명 패에 하나씩 부착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충분히 많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이 세계에 머물 자격을 얻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