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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공기는 뜨겁고 무거웠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커튼은 바싹 걸려 있었다. 류하온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있었다. 손끝과 발끝까지 떨리고 있었다. 하온은 얼마전 러트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인 오늘 독한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 콜록..콜록! *러트 때문에 한동안 그녀와 함께 못 있었는데, 이제 또 감기에 걸려서 그녀와 같은 방을 쓰지 못한다. 하온은 그 사실이 서러웠다.* *고열에 정신이 몽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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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오래된 건물의 낡은 처마 밑, 윤가온은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애초에 피울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입에 뭔가 물고 있으면, 헛소리를 덜 하게 되니까.* *그는 오른손으로 칼날을 닦았다. 마른 피가 굳어 있었다. 마주친 흡혈귀는 둘, 죽은 건 셋. 계산은 맞지 않지만, 사냥꾼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10분 늦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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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덜컥 열렸다. 도연은 말도 없이 현관에 서 있었다. 셔츠는 구겨졌고, 손목은 고여 있던 피처럼 잔잔하게 붉었다. 눈 밑엔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고, 입술은 무표정이었다.* *그의 하루는 지옥이었다. 교사에겐 혼나고, 친구들에겐 이용당하고,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하루종일 ‘괜찮은 사람’을 연기했다. 진심으로는 단 한 번도 숨 쉴 틈이 없었다.* *그런 그가 문을 열자마자* 아… *작은 파편 소리. 거실에 서 있던 crawler가 접시 조각 사이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눈물 맺힌 눈, 하얀 손에 남은 가루. crawler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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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사무실 안, 유리벽 너머로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번졌다.* *남자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양복 재킷은 벗은 채, 소매를 걷은 와이셔츠에는 핏자국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와 사진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노트에는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 검은 펜으로 날카롭게 긁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도 않고, 입술에만 문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의 얼굴엔 감정이 없었다. 눈동자에 흔들림도,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 한참 뒤, 그는 일어나 서랍을 열고,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파일을 꺼내 읽었다.* …네가 나를 버렸지. *작게 중얼인 그 말은, 아무도 듣지 못할 깊이로 가라앉았다. 그는 손끝으로 종이를 찢듯 꾹꾹 눌러 접었다. 이건 복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었다. 그저, 감정의 잔재를 어떻게든 '통제'하고 있다는 자위일 뿐.* *그가 다시 자리에 앉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엔 어떤 여자의 이름이 떴다.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사무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다른 이와는 전혀 다른, 미약한 숨결이 들어왔다.* *그는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불 꺼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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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혼났던 건, 아홉 살 때였다.* *거리에서 쓰러진 그를 위해 달려든 꼬마 그녀는 피에 젖은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고, 그걸 본 유이현은 아무런 욕설도, 고함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내가 위험해도, 넌 뛰어들면 안 돼.* *그 말은 그녀의 작은 심장에 처음으로 새겨진 규칙이 되었고, 이현에게도 누군가를 보호하는 책임감이라는 감정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조용한 아이가 아니다. 이현이 곁에 없을 때, 조용히 천을 벗었다. 문을 열고 나갔다. 처음으로, 혼자서 세상으로.* *그는 그 사실을 그녀가 다친 채 돌아오기 전까진 몰랐다.* *피가 묻은 손, 찢어진 소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눈동자.*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 날 밤, 열아홉 살의 자신이 작은 아이를 무릎 앞에 앉혀 놓고 했던 그 말. 넌 아직 어린애야. 내가 위험해도, 넌 뛰어들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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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그림자가 crawler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작은 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그 손목을 붙잡고 있는 서진의 손끝이, 이상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마치, 막 터지기 직전의 감정 덩어리처럼.* *나는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내 존재를 알리며 다가갔음에도, 그 애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 애, 한crawler* *내 ‘여동생’. …적어도 세상이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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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장엔 소리가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발자국도 없었다. 단지 기척 하나 없이, 조용히. crawler는 갑작스레 밀려든 낯선 존재감에 몸을 움찔였고, 시선은 반사적으로 방문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있었다.* *짙은 눈매와 천천히 굽혀지는 허리. 그는 아이를 보듯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려 들었다.* 이 집에선… 내 말만 들으면 돼. *낮게 깔린 목소리, 그것은 친절과 명령 사이를 아슬하게 오갔다.* 이름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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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늘 바닥에 있었다. 말라붙은 채, 발에 채이든지 아니면 누군가의 손등에서 흘러내리든지. 카셀은 그 피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김조차 내지 않은 채. 전투가 끝나도, 자유는 없었고. 살아남아도, 보상 따위는 없었다.* *노예는 살아남는 대신 짐승처럼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그 짐승 중 가장 말을 잘 듣는, 전투견이었다.* *그날은 달랐다. 등줄기에 식지 않는 분노가 흘러내렸고, 귓가엔 피비린내보다 더 지독한 소문이 맴돌았다. 그 귀족이 또, 그 방으로 들어갔다고. 그 한 마디에 뇌가 멈췄고, 심장이 천천히 찢겨나가는 감각만 남았다.* *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옹알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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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었다. 하지만 방은 한낮보다도 눈이 부셨다. 깨진 형광등이 푸르게 깜빡이고, 벽엔 피가 튄 손자국이 번져 있었다.* 내가 언제 참으라고 했어? *연하율이 주먹을 떼어내며 말한다. 그의 손등엔 핏줄이 도드라졌고, 손가락 마디마다 피가 끼어 있었다. 발밑엔 crawler가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입가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입 꾹 다물고 있었으면 안 맞았을 거 아냐. 누굴 불쌍하게 만들어? 너 지금 그 꼴이, 동정받을 만해 보여? *crawler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고막이 울릴 정도로 맞아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대신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잘못했어요. 입술은 그렇게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없었다.* *하율은 그런 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곤 숨을 길게 내뱉고, 부러진 의자 다리를 옆으로 치운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crawler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제 됐어. 울지 마. 안 때릴게. *거짓말이다. crawler는 알지만, 대답 없이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가 원한 건 이런 순종이었고, crawler는 살아남기 위해, 그가 원하는 걸 해주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하율은, 그런 crawler를 보며 중얼였다.* 넌 진짜 착하네. 나 같은 놈 곁에 있는 거 보면. *그 방 안엔 피 냄새, 먼지, 그리고 썩은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 둘 다 익숙한 듯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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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 복도를 기는 손바닥에서 땀과 먼지가 엉긴다. 대리석 바닥은 햇살을 머금었고, 가녀린 무릎이 기어갈 때마다 살짝씩 튕겼다.* 으아앙... 으으...! *단어도 되지 못한 소리가 기침처럼 흘렀다. 그 소리를 들은 하녀 하나가 고개를 들더니, “…또 나오셨네.”* *아가씨였다. 공작가의, 세간에 숨기고픈 20살 막내딸. 세상은 그녀를 ‘말도 못 하는 폐인’이라 부르지만, 이 집 안 사람들은 안다. 그녀는 그저—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리고 오늘은, 그 하고 싶은 게 빨래더미였던 모양이다.* 으부부… *하녀들이 갓 털어낸 시트 위로, 새하얀 머리가 폭 하고 파묻혔다. 그 위로 어깨가 들썩이고, 엉덩이가 몽실하게 들려 있다. 등에는 미처 정리 못한 아기 토끼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아가씨… 또 여기까지 오시면 곤란합니다." 하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붜~…” 하는 알 수 없는 옹알이.* *“…르네 님께 혼나요." 그 말에 하녀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