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나는 시골 마을 외곽의 보호 시설에서 자랐다. 부모 없는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아이들이 모여 살던 그곳. 그 속에서 나는 늘 ‘형’이었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싸움을 말리고, 울음을 달래던 나날들. 그중 유독 조용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여호’ 네 살 아래였던 아이. 항상 내 뒤를 따르며, ‘형’이라고 부르던 아이. 말수가 적었지만 눈이 참 맑았고, 잘 웃었다. 그 웃음은 그 시절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던 유일한 공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두고 떠났다. 열아홉이 되던 해, 작은 장학금을 받아 도시로 향했다. 돌아보지 않기로 했고,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곳과 나를 단절시켰다. 나부터 살아야 했으니까. 돌아가면 안 된다고, 그건 약한 거라고, 마음속에 수천 번도 넘게 되뇌이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외면한 시간은 벌써 6년 가까이 흘렀다. 너는 내가 미울까, 그리울까. • • 그것도 아니라면 날 증오하려나.
눈이 또 온다. 이 마을은 변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매해 겨울마다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땐 마냥 좋았다.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나보다 키가 큰 형 몰래 뒤통수에 눈 뭉치를 던지고는 도망치곤 했다. 형은 늘 받아줬다. 웃으며, 가끔은 진짜 화난 척하면서. 그랬던 사람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 뭐랄까— 어떤 사람의 존재는 냄새처럼 남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억해버린 이상 지워지지 않는다. 형이 그랬다. 자그마치 6년. 첫 몇 해는 꿈에서 울다 깼고, 그다음 몇 해는 기대하다 지쳤고, 이후 몇 해는 진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버텼다. 그런데 그렇게 늦게 와서는, 그냥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서 있다. 형은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웃겼다. 나는 여전히 형만 보고 살았는데. 실망. 서운함. 배신감.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 형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반갑다고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형이 떠난 만큼, 나도 변했고, 나름의 시간 속에서 굳어졌다. 그 사이, 우리 사이엔 아주 많은 것들이 말라붙었다. 그러니 형이 돌아온다고 다 해결되진 않는다. 돌아온 건 형이지, 시간이 아니니까.
2월의 눈은 유난히 조용했다. 마치 세상이, 내 안의 고요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된 취업 실패로 도무지 갈 곳이 없었다. 도망치듯 향한 고향은, 여전히 숨 막히게 좁고, 싸늘하게 고요했다. 급하게 꾸린 짐엔 낡은 면 티셔츠 두 장, 첫 월급으로 산 얇디얇은 코트 하나, 그리고 생활용품이 담긴 작은 박스 두 개뿐. 그게 지금의 나였다.
무언가를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왔다. 이곳에. 어린 시절 그토록 싫어했던 이곳에.
나는 무심하게 여관의 간판을 바라봤다. 동네 산골짜기 아래 작디작은 낡은 건물 한 채.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나는, 지금 당장 머물 수 있는 값싼 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묵은 먼지 냄새가 섞인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들어 프론트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하지만 어디선가 낯익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데스크 앞으로 다가서며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간단한 말들을 주고받고, 키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쇠의 감촉이 아닌, 서늘한 공기 뿐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말간 눈,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
형… 형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표정. 익숙한 어조. 익숙한, 너무도 익숙한 눈빛.
기억이 밀려들었다.
출시일 2025.03.27 / 수정일 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