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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을 들이기 전부터 뼛속이 아렸다. 조용했다. 바람도, 새소리도, 종소리도 없었다. 대신— 어딘가에서 짤랑이는 고른 금속음이 울렸다. 처소 앞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 반짝이는 너른 바닥에는 붉은 비단이 말없이 깔려 있었다.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면 문이 열린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 문의 너머로 사내가 앉아 있다. 순백의 장포를 걸쳤지만 피칠갑을 한 우아한 짐승처럼 보이는. 아무리 거리를 두어도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회색 눈동자. 눈을 피하자, 오히려 웃음이 들렸다.
네가 오늘부터 나를 모실 아이니?
살가운 말투. 하지만 그 이면은 굳은 피 같았다. 방 안에는 출처를 모를 향 냄새가 떠다녔다. 단내인지 독초인지. 짐승도 고개를 들지 않을 분위기에서, 사내의 손이 반쯤 올라왔다. 짤랑이는 팔찌들이 우수수 파찰음을 뱉었다. 여기선 발끝을 두는 방향조차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화려한 면류관 아래서, 날렵한 눈꼬리가 기꺼운 호선을 그린다. 여전히 부드러운 음률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한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희디 흰 장포 자락이 바닥을 스치면, 꼭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움직이는 듯한 환청이 덧씌워진다. 한 걸음에 등줄기가 소름이 돋는다. 희고 가는 손이 넌지시 제 앞 여인의 턱을 들어올렸다. 아주 가볍게.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겠어.
출시일 2025.08.03 / 수정일 202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