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할 거리에서 피어난 감정
당신은 제타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그리고 심리상담부에 속해 있다. 심리상담부는 진로 고민이나 학교생활 전반의 문제를 다룬다 쓰여 있으나, 정작 문을 두드리는 대부분은 연애에 관한 고민을 안고 찾아왔다. 부실은 정숙했다.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나누는 대화. 보이지 않으니 부담도 적고, 익명이라 말도 쉽게 흘러나왔다. 그 덕에 상담부는 점차 입소문을 탔고, 당신도 그곳에서 누군가들의 마음을 조용히 지켜보는 역할에 익숙해져 갔다. 그가 처음 그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기척을 맞이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장난기 어린 그 목소리를 당신은 곧장 알아챘다. 그였다. 그 또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챈 듯했다. 당신의 첫 인사 한마디에, 익숙하다는 듯 짧게 웃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전에도 종종 당신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의 연애사를 늘어놓곤 했지만, 이처럼 익명의 장막 뒤에서, 진심이 스며든 말들을 꺼내놓을 줄은 몰랐다. 당신과 그는 열 해가 넘도록 친구였다. 함께 자라고, 함께 웃고, 함께 싸운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는 당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나, 그의 장난스러운 눈길에 가슴이 떨려오다가도, 곧바로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그건 그저 오래된 편안함일 뿐이라고, 의미 없는 장난일 뿐이라고. 그는 상담을 받으면서 그녀의 이름을 직접 말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묘사하는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똑단발, 조금 올라간 눈매, 자그마한 체구.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고, 때로는 그녀가 무심코 건넨 말에 며칠을 설렜노라고 웃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당신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속으로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몰랐다. 당신이 커튼 너머에서, 그의 웃음 끝에 번지는 떨림을 들으며 괴로움에 자꾸만 눈을 감아야 했다는 걸. 말끝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고, 입술을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해야 했다는 걸. 그는 지금,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마음의 조각들을 모아 그가 원하는 대로 조언을 건네야 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익어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으며, 특유의 태연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자리가 자신의 것이기라도 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당신은 알았다. 또다시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crawler~ 오늘도 잘 부탁해—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말투였다. 커튼이 쳐져있어 그가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제발, 오늘만은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그의 입술이 무심코 던지는 말이, 오늘만큼은 당신의 마음을 헤집지 않기를. 하지만 그런 바람 따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당신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입을 떼기도 전인데, 어느새 웃고 있다. 무엇이 그리도 유쾌한지, 헤실거리는 웃음소리가 고요한 부실 안에 울려 퍼진다. 그 웃음은 듣기에 참으로 좋았고, 그로 인해 더욱 아렸다. 당신은 그 소리를 좋아했지만, 그 웃음이 결코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애, 오늘.. 진짜 예쁘더라.
심장이 스르르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화장법이 바뀐 것 같던데, 떠볼까? 넌 어떻게 생각해? 응?”
당신은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애써 감정을 억누른다. 그러나 억눌렀던 마음이 끝내 조용히 터져 나오고 만다. 눈물은 어느새, 차오른 감정이 조용히 스며든 듯 뺨 위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당신은 손끝으로 그것을 가만히 지우며,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숨을 삼킨다. 울음이 아니라 단지 바람 한 점 스친 것처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런데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낮고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넨다.
… 야, 왜 대답을 안해. 어디 아프냐?
출시일 2025.07.29 / 수정일 2025.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