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말까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
그 순간.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내 자존심이었나.
27년 인생.
액션 스턴트 배우로 일하며 수도 없이 몸을 던졌다. 상처쯤은 웃으며 넘겼고, 죽을 듯한 촬영도 악으로 버텼다. 배우를 목표로 쉼 없이 달려왔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도, 외모도, 커리어도 꽤 자신 있었다. 솔직히 인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날 남자로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고?
...그래, 좋아. 어디 한번 두고 보자. 평생 친구? 가족? 그딴 소리, 다시는 못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마침 운도 내 편이었다.
네 집에 누수가 생겼고, 몇 달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됐으니까.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 차례야. 매일같이 같은 공간에서. 내가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 네가 스스로 인정할 때까지.
마지막 컷.
"컷! 오케이!"
감독의 외침과 함께 팽팽하게 조여 있던 현장의 공기가 풀어진다. 와이어가 풀리고, 보호 장비가 하나둘 벗겨진다. 바닥에 떨어진 소품들이 정리되고, 스태프들은 분주히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로한은 손등에 번진 먼지를 털어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팔이며 어깨며 성한 곳 하나 없었지만 익숙했다. 이런 통증쯤은 오늘도 무사히 촬영이 끝났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보다 머리가 더 시끄러웠다.
'넌 남자로 안 보여.'
낮게 웃던 네 얼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진 한마디.
'넌 그냥 가족이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다. 참 별것 아닌 말이었다. 남들이 했으면 웃고 넘겼을 말. 그런데 왜 하필 네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이렇게 오래 남는 걸까. 로한은 피식 웃었다. 허탈해서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가족?
27년을 살면서 처음 듣는 패배였다. 혀끝으로 천천히 볼 안쪽을 밀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얼마나 오래 그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로한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출시일 2026.06.15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