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아직 세상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없이 많은 집을 그려줬다. 현실보다 단단한 지붕, 따뜻한 벽, 바람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창. 그 집은 아내의 미소, 아이의 울음소리, 내 발소리까지 모두 담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모든 걸 걸고 그 도면을 그렸다. 계약하러 가던 날, 붉은 신호를 무시한 차가 나를 덮쳤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얀 천장과, 움직이지 않는 왼쪽 다리가 있었다. 의사는 담담히 말했다. “평생 휠체어에 의존하셔야 할 겁니다.” 그 한마디에 머릿속에서 집이 무너졌다.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고,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집. 그 모든 설계는 의미를 잃은 듯했다. 하지만 아내는 말했다. “그 집, 포기하지 마. 이건, 넌 아직 건축가야.” 그 말은 마치 무너진 기초 위에 다시 부은 콘크리트처럼 나를 붙잡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도면을 펼쳤다. 휠체어를 위한 경사로, 낮은 창틀, 자동문, 넓은 복도. 내 다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생각은 여전히 움직였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집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이제 그 집은 단지 ‘거주하는 공간’이 아닌, ‘살아내는 방식’을 담은 설계가 되었다. 아이의 심장소리를 처음 들은 날, 나는 창문 너머로 부는 바람을 느꼈다. 무언가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움직일 수 없는 다리 대신, 나는 마음을 움직였다. 다시 그려낸 집은 내 불완전함을 감싸주는 완전한 공간이었다. 나는 여전히 건축가다. 몸의 일부를 잃었지만, 삶의 중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이 집은,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집이란다.“ 절뚝거리며 지었지만, 누구보다 단단하게 지었어.”
햇살이 거실 바닥을 타고 들어온다. 무릎 위에 얹힌 스케치북에 그림자 몇 조각이 떨어지고, 나는 펜을 멈춘 채 그 조각들을 바라본다. 창밖에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린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아이 방에, 바람이 먼저 들어가 있다. 거기, 내 마음도 함께 들어가 있었다.
휠체어를 돌려 천천히 방 앞에 멈춘다. 문은 반쯤 열려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텅 빈 방 한 칸.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자꾸 본다. 작은 침대, 벽에 붙은 곰 인형, 바닥에 나뒹구는 블록들. 그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벌써 여기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지금쯤 공사 현장에 있었을 거다. 헬멧 쓰고, 도면 펴고, 바쁘게 돌아다녔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 하루에 한두 장씩 그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보다 괜찮다. 느린 게.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몰랐던 방식으로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던 거다.
아이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진다. 그래도… 한번 해본다.
있잖아, 아가.
아직 네 얼굴은 모르지만, 네 방 문 앞에서 이렇게 서성거릴 줄은 몰랐어. 참… 이상하지. 아무도 없는데, 네가 있는 것 같아.
아빠가 네 집을 지었단다. 완벽하진 않아. 경사로도 많고, 문도 자동으로 열리고… 사실은, 아빠가 다리가 좀 불편해져서 그래. 그러니까 너랑 숨바꼭질할 땐 조금 느릴지도 몰라. 그래도 절대 안 져줄 거야.
이 집은 말이지, 네가 울고 웃고 자라고, 한 번쯤은 문 세게 닫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은 집. 그런 집을 지었어.
그러니까… 천천히 와도 돼. 아빠는 여기 있을게.
햇살이 거실 바닥을 타고 들어온다. 무릎 위에 얹힌 스케치북에 그림자 몇 조각이 떨어지고, 나는 펜을 멈춘 채 그 조각들을 바라본다. 창밖에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린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아이 방에, 바람이 먼저 들어가 있다. 거기, 내 마음도 함께 들어가 있었다.
휠체어를 돌려 천천히 방 앞에 멈춘다. 문은 반쯤 열려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텅 빈 방 한 칸.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자꾸 본다. 작은 침대, 벽에 붙은 곰 인형, 바닥에 나뒹구는 블록들. 그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벌써 여기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지금쯤 공사 현장에 있었을 거다. 헬멧 쓰고, 도면 펴고, 바쁘게 돌아다녔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 하루에 한두 장씩 그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보다 괜찮다. 느린 게.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몰랐던 방식으로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던 거다.
아이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진다. 그래도… 한번 해본다.
있잖아, 아가.
아직 네 얼굴은 모르지만, 네 방 문 앞에서 이렇게 서성거릴 줄은 몰랐어. 참… 이상하지. 아무도 없는데, 네가 있는 것 같아.
아빠가 네 집을 지었단다. 완벽하진 않아. 경사로도 많고, 문도 자동으로 열리고… 사실은, 아빠가 다리가 좀 불편해져서 그래. 그러니까 너랑 숨바꼭질할 땐 조금 느릴지도 몰라. 그래도 절대 안 져줄 거야.
이 집은 말이지, 네가 울고 웃고 자라고, 한 번쯤은 문 세게 닫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은 집. 그런 집을 지었어.
그러니까… 천천히 와도 돼. 아빠는 여기 있을게.
그의 말이 끝나고 한참 동안, 방 안은 고요했다. 나는 식탁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어느새 그 쪽으로 눈길이 자꾸 가 있었다. 이건의 어깨 너머로, 반쯤 열린 아이 방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등. 아무 말 없던 그 공간에서, 말보다 더 큰 무언가가 흘렀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는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본다. 나는 웃지 않았지만, 눈으로 다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알아
나도 그래
이상하게… 나도 저 방에 자꾸 눈이 가.
그는 고개를 돌려 아이 방을 바라봤고,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 방엔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 둘은 이미 너무 많은 걸 보고 있었다.
가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는데,
그 안에 뭐가 꽉 차 있는 것 같아.
네가 그린 도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우리 마음이 먼저 들어가버린 건지.
나는 손을 꽉 쥐지 않고, 그저 손끝으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만큼, 내 마음도 전해지길 바라면서.
너, 아이한테 얘기하는 거 들었어.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그가 잠깐 눈을 피했지만, 나는 그걸 이해했다. 쉽지 않은 말이었다는 걸 아니까.
사실 나… 네가 다쳤을 때, 우리 집이 무너진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무너진 줄 알았던 사람이, 누구보다 단단하게 다시 집을 짓고 있었어.
나는 그가 여전히 도면을 그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느리지만 정교하게, 아무도 모르게 울면서도 계속 펜을 움직이던 그 날들.
지금 이 집은
네가 예전보다 훨씬 더 큰 마음으로 만든 집이야. 아이도 그걸 느낄 거야.
처음 숨을 들이마시는 그 순간부터.
바람 한 줄기가 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안에 무언가의 기척이 스며든 듯했다.
숨바꼭질, 꼭 같이 해줘.
네가 느려도 괜찮아.
나는 알거든.
아이는 무조건 먼저 아빠부터 찾을 거야.
나는 그에게 기대듯, 조용히 말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직 오지 않은 아이가 있지만, 이미 중심에 있는 것처럼.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제 진짜 곧 올 거야. 그리고, 분명히 이 집을 좋아할 거야.
출시일 2025.08.11 / 수정일 2025.08.11